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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화가들은 왜 왼손잡이를 즐겨 그렸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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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비밀』(한길아트·2003년·6만원)을 쓴 데이비드 호크니(74)는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하나다. 추상미술, 각종 미디어 아트, 설치 미술의 등장으로 현대미술에서 구상회화가 잊혀지고 있을 때 그는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단단한 소묘, 밝고 장식적인 색채, 시원하고 세련된 붓질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회화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이 책은 그림을 실제로 그리는 화가만이 볼 수 있는 신비한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다.

50여 년 전 학생 시절 그는 앵그르의 드로잉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앵그르의 드로잉들을 복사기로 확대해서 선들을 상세히 검토했다. 드로잉의 선들은 단호하고 대담하며, 빠르게 그려졌다. 수정한 흔적도 없었다. 앵그르는 미술사에서 데생이 가장 뛰어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앵그르뿐만 아니라 많은 거장들이 디테일에 충만한 ‘완벽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들은 거장들의 위대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거장이니까.

그러나 호크니는 화가였고, 같은 화가로서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작업실 큰 벽에 여러 시대의 그림들을 연대기적으로 쭉 붙여놓고 비교하면서(오른쪽 사진) 거장들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들처럼 카메라 루시다나 카메라 옵스쿠라 같은 옛 도구들을 직접 실험해 보고 관련 분야 학자들에게 도움도 받았다. 그리고 이 놀라운 그림들의 비밀은 거울-렌즈의 광학적인 이용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광학적 도구의 사용을 중심으로 그는 서양미술사를 다시 들여다보며 흥미로운 사실들을 밝혀낸다. 그는 1430년께 플랑드르 지방에서 광학이 이용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르놀피니의 결혼’으로 유명한 반 에이크 같은 플랑드르 지방의 작가들은 사물 하나하나를 렌즈로 세심하게 관찰해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냈다. 르네상스적 원근법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 사용된 렌즈 성능이 제한적이어서 초점을 다시 맞추느라 렌즈와 캔버스를 자꾸 이동시켰기 때문에 이 화가들의 그림에는 다시점이 존재한다.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400여 년간 서양 미술사를 지배하는 원리인 일점 소실점에 근거한 수학적 원근법이 고안됐다. 이탈리아의 원근법과 광학적 도구의 사용이 결합되면서 미술사에는 ‘완벽한’ 그림들이 등장하게 된다. 광학의 사용은 은폐된 반면, 원근법의 사용은 신념으로, 일종의 세계관으로 격상되며 이후 서양미술사를 지배하게 된다.

1500년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미 광학적 도구인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해 글을 쓴다. 그보다 후배인 라파엘이나 조르조네 같은 작가들 역시 광학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16세기 말 렌즈의 성능이 대대적으로 개선되면서 광학적 도구의 사용은 그림에 여러 흔적을 남겼다. 그림 속에서 왼손으로 와인을 마시거나 무언가를 들고 있는 왼손잡이 인물들이 부쩍 많아진 것은 이 무렵이다. 거울 같은 광학적 도구를 사용해서 그리면 상이 반전되기 때문에 오른손잡이 모델이 왼손잡이처럼 그려지게 된다. 이런 장치들을 이용해 화가들은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복잡한 양탄자, 옷감의 화려한 무늬, 갑옷의 번쩍거리는 질감들을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17세기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 카라바조는 복잡한 구성의 그림을 그릴 때조차도 밑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드로잉도 전혀 남기지 않았다. 대신 반드시 모델들을 앞에 두고, 광학적인 투영법을 사용해 모델들의 윤곽을 체크하며 그려나갔다. 오랜 기간 동안 회화의 목표는 세상의 완벽한 재현이었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회화에는 중대한 변화가 초래된다. 일점 소실점을 가진 원근법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은 사진이었다. 이제 화가들은 광학적 도구를 버리고 자신의 눈에 의지해서 사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마네, 인상주의, 세잔, 입체주의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 세잔의 그림은 시각 원리에 근본적인 혁명을 가져왔다. 그는 눈의 진실에 따라 그림을 그렸고, 그 결과 원근법은 결정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다. 세잔은 인간은 언제나 사물을 복수의 시점에서, 때로는 모순적인 위치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그림으로 증명했다. 인간은 두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점 소실점에 근거한 원근법이 설정한 것은 한 눈을 가진 인간이었다(우리는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한 눈을 감는다).

세잔과 더불어 서양미술사는 원근법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이후로 원근법은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는 인간의 시각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방법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에르윈 파놉스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현실을 재현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동양에서는 이런 원근법 없이도 멋진 회화 작품들을 얼마든지 그려왔다. 원근법을 절대시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서구의 특정 관념을 절대시하는, 폭력적인 일이었다고 호크니는 지적한다.

호크니가 이 이론을 처음 발표했을 때 많은 미술사가들은 호크니가 대가들의 권위를 훼손한 듯이 경악했다. 그러나 호크니는 분명히 말한다. 광학적인 도구는 사물의 위치를 정확하게 잡아주는 장치일 뿐 그림을 그린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앵그르나 되니까 그런 드로잉을 그릴 수 있었다고.

사소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연구가 미술사를 지배하던 절대적 관념을 해체한 셈이다. 관념의 자유는 시각의 자유와 연관되기 마련이다. 그는 컴퓨터와 디지털 도구가 지배하는 “흥미로운 시대가 곧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더불어 이 시대에도 “정적인 그림의 힘은 영원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요즘 그는 아이폰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데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시대의 이름이 무엇이건 데이비드 호크니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이진숙씨는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 작품에서 느낀 감 동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미술의 빅뱅』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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