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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3월 새 협약 발효, 7월 1조1400억 유로 조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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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호 20면

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집행위원장(왼쪽부터)이 새로운 재정통합 협약을 논의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베를린 AF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모처럼 정치력을 발휘했다. 특히 돈줄을 쥐고 새 협약을 강하게 밀어붙인 메르켈 총리의 뚝심이 통했다. 두 정상은 지난 5일 새 협약을 공동 제안하면서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8일까지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헤르만 반롬푀위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과 ‘미니 정상회의’를 여는 등 세를 규합했다. 결국 두 정상은 새 협약의 승선을 거부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의 기싸움에서 ‘26대 1’이라는 압승을 거뒀다.

모처럼 대타협 이끌어낸 EU 정상회의

새 협약은 당초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7개국)만의 잔치’의 경품에 그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상회의가 열리면서 시장의 기대가 증폭되고 대내외 압박 수위가 높아지자 불가리아·덴마크·라트비아·폴란드·루마니아 등이 잇따라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체코·스웨덴·헝가리 정상들까지 회의 막판에 각국에 돌아가 의회에서 논의하겠다는 긍정 입장으로 돌아섰다. 영국만 거부하는 모양새가 됐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영국 총리가 수용하기 힘든 요구를 내걸어 27개국 전원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독일 시사지 슈피겔은 이날 ‘영국이여 안녕(Bye, Bye Britain)’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기도 했다.

새 협약에는 내년 3월부터 회원국들이 재정적자의 비중을 국내총생산(GDP)의 3%, 누적채무는 60% 이내로 유지하는 이른바 ‘황금률’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기존 EU조약인 ‘유럽성장안정협약’에도 “당해연도 재정적자가 GDP의 3%, 누적 공공부채는 60%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하지만 EU 집행위가 이를 어기는 회원국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강제력이 없어 해당 규정은 사문화됐다. 새 협약엔 회원국 모두 황금률을 헌법이나 법규에 반영하고, 이를 위배할 경우 자동으로 제재를 받는다. 또 EU 집행위가 회원국의 예산 편성단계부터 개입할 수 있다. 회원국들은 매년 10월에 이듬해 예산안을 집행위에 제출해 심사를 받는다. 국채 발행 계획도 사전에 알려야 한다. 집행위와 회원국 간 이견이 있으면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중재한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새 협약 합의만큼 관심을 끈 것은 유로존 구제금융 확대다. 정상들은 기존 유럽재정안정기금(EFSF) 4400억 유로에 유럽안정화기구(ESM) 5000억 유로를 예정보다 1년 앞당겨 내년 7월까지 조성키로 했다. 당초 EFSF는 ESM으로 대체되는 한시 기금이었다. 헤르만 반롬푀위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2013년까지 EFSF를 유지해 두 기금이 한동안 병존하면 금융시장 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EU 회원국 중앙은행들이 2000억 유로를 모아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해 재정 위기국에 지원한다. 이 중 1500억 유로는 유로존 국가, 500억 유로는 스웨덴 등 비유로존 국가가 부담한다. 분담비율 등 구체 사항은 앞으로 열흘 안에 확정한다. 구제금융은 EFSF(4400억 유로)와 ESM(5000억 유로)의 기금에 국제통화기금(IMF) 지원금(2000억 유로)을 합해 1조1400억 유로(1740조원)까지 늘어난다. 이 규모는 시장이 기대한 위기진화 자금 2조3000억 유로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급한 불은 끌 수 있다는 평가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EU 재정위기의 근본 해법으로 지목된 유로존 공동채권 도입은 독일 등 우량재정 국가들의 반대로 물 건너간 분위기다. 다만 반롬푀위 상임의장과 바호주 집행위원장은 유로채권 발행 가능성에 대해 ‘장기적인 전망의 길’로 열어 두자는 입장이다. 바호주 위원장은 8일 독일 일간지 디 벨트와의 회견에서 “유로 채권은 중장기적으로 유로존 안정과 역내 유동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세계 금융시장은 EU 정상회의를 전후해 급등락 장세를 보였다. 유럽에 이어 미국 증시가 8일 잇따라 실망 전망으로 추락했다가, 9일에는 EU 정상회의 약발로 크게 올랐다. 9일 미국 나스닥 지수는 1.94% 급등한 2646.85를 기록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DAX 30 지수는 1.91% 오른 5986.71로 마감했다. 이탈리아 밀라노 FTSE Mib 지수는 3.37%나 급등했다. 새 협약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영국의 런던 FTSE 100 지수도 0.83% 올랐다.

세계는 EU 정상회의의 훈풍이 연내 열릴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와 그 이후의 IMF 움직임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G20 회의와 IMF를 사실상 이끄는 미국의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9일 “미국 등 여러 나라는 EU 정상회의의 성공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화답했다.

모처럼 시장 분위기와 기대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번 정상회의가 ‘양치기 소년’처럼 말장난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7월과 10월 EU 정상회의가 ESM 출범과 EFSF 증액이라는 의욕적 조치를 마련했으나 금융시장에서 잠깐 반짝하다 다시 돈 가뭄에 몰린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유럽 정상들이 발 빠른 구제금융 확대와 강력한 재정통합 조치들을 추진해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조만간 EU 회원국들과 ECB의 신용등급을 발표한다. S&P는 EU 정상회의 결과에 따라 이들의 신용등급 수준을 결정하겠다고 지난주 예고했었다. 만일 부정적 평가가 나온다면 금융시장에는 다시금 회오리가 몰아닥칠 것이다.

내년 시장 전망은 여전히 어둡다. 유럽은행청(EBA)이 8일(현지시간) 내놓은 자료를 보면 역내 71개 주요 은행에 총 1147억 유로의 막대한 자본확충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10월 조사 때의 1064억 유로보다 8%가량 늘었다. ‘돈줄’로 꼽히던 독일 은행들도 자본 확충이 필요한 규모가 총 52억 유로에서 131억 유로로 늘었다. 중국 경제의 경착륙에 대한 우려 목소리도 있다. 블룸버그 통신이 5~6일 투자자 등 1097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61%가 5년 내(2016년까지) 중국이 금융위기에 몰릴 수 있다고 봤다. 중국은 지난 2년간 제조업 실적 부진과 주택경기 침체, 수출 증가세 둔화 등으로 성장속도가 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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