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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나리의 시시각각

낡은 회사, 새 살이 돋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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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지난달 30일 트위터의 대세는 ‘나는 꼼수다’ 여의도 콘서트였다. 점심 나절쯤 낯선 용어 하나가 끼어들었다. ‘H3’. 늦은 오후엔 거의 나꼼수에 버금갈 만큼 많은 글이 올라왔다. KT의 인터넷서비스 자회사 KTH가 연 개발자 콘퍼런스라고 했다. 그런 행사라면 요즘 삼성전자부터 SK텔레콤·NHN까지 안 하는 회사가 없다. 하나 이렇듯 뜨거운 반응은 처음이었다.

 행사 참가자들이 실시간 쏟아내는 트위터 글엔 흥분이 묻어났다. ‘신선한 충격’ ‘엄청난 에너지’ ‘치명적 매력’…. 그중 유독 눈길을 끈 건 @melodeon(한성은)의 글이었다. ‘KT에 빨대 꽂아 버티는 회사라고 생각했던 KTH가 어떻게 저런 괜찮은 사람들을 모아 호평 일색의 행사를 치를 수 있었을까. 딱히 저 낡은 회사에 터닝 포인트가 생기긴 힘들었을 것 같은데’. 나도 궁금했다.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KTH의 전신은 PC통신 시절의 맹주 하이텔이다. 네이버·다음이 등장하면서 이 회사는 말 그대로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 됐다. 포털 ‘파란’을 열었지만 영광은 다시 없었다. 2009년 3월 서정수 전 KT 그룹전략CFT장이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당시 이 회사는 KT에 각종 IT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서 사장은 KT의 CEO 물망에도 올랐던 인물이다. 한데 밀려 예까지 왔다,라고 KTH 직원들은 생각했다. 딱히 기대는 없었다. 서 사장이 “적자를 봐도 좋다. 첨단 소프트웨어 기업이 되자. 모바일로 승부하자”고 해도 그러려니 했다.

 서 사장은 행동했다. 예산 제도부터 없앴다. 미리 짠 안에 매여서는 위험도 높은 도전을 할 수 없다고 봤다. 새 피를 수혈했다. 박태웅 전 열린사이버대 부총장을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기술과 벤처문화에 밝은 그에게 믿고 맡겼다. 조직을 팀이 아닌 프로젝트 단위로 재편했다. 직급이 어떻든 제안한 사람이 매니저가 됐다. 모회사인 KT로부터 석연찮은 반응이 왔다. 기술개발에 집중하다 보니 매출도 떨어졌다. 경영진은 외려 변화의 속도를 높였다.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려면 글로벌 플레이어처럼 행동해야 한다. 결론은 ‘개발자가 행복한 회사’를 만드는 것. 박 부사장은 업계에서 대가(大家)급으로 통하는 엔지니어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삼성전자 책임연구원이던 권정혁 현 KTH 기술전략팀장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박 부사장은 권 팀장 앞에서 회사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세 차례나 했다. 정작 권 팀장을 움직인 건 따로 있었다. “대화 중 스치듯 KTH 서비스의 문제점을 말했다. 다음 날 보니 그게 딱 고쳐져 있더라”는 거였다. 그는 “최신 기술을 모르면 아예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최고경영진과 그런 대화가 가능하다니, 놀라웠다”고 회상했다.

 이런 노력 덕분일까, KTH는 지난해부터 ‘푸딩 얼굴 인식’ ‘푸딩 카메라’ ‘아임인’ 같은 히트 애플리케이션을 속속 내놓으며 모바일 업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이 회사 앱 사용자는 2000만 명. 카카오톡에 이어 국내 2위다. 이번 H3는 이런 KTH의 역량을 총집결한 행사였다. 여타 국내 콘퍼런스와 확연히 달랐다. 외부 명망가 대신 실제 KTH 개발자들이 무대에 섰다. 현장에서만 알 수 있는 생생한 스토리가 이어졌다. 자사 홍보는 일절 없었다. 대신 어렵게 개발한 기술들을 아낌없이 공개했다. SW기업 홍익세상의 노상범 대표는 “발표자들에게서 행복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좋은 공연을 본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고 전했다.

 모든 CEO가 혁신을 말한다. 모든 IT기업이 ‘개발자 중심’을 외친다. 하지만 성공사례를 찾긴 힘들다. KTH는 첫발을 잘 떼었다. 사람을 중히 여긴 덕분이다. 큰 회사라 해서 작은 기업을 벤치마킹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예를 들어 LG전자가 KTH로부터 배울 점은 없을까. 기술 기업은 경영진이 ‘두두두’ 헬기 타고 공장과 연구소를 열심히 드나든다 해서 바뀌지 않는다. 요즘 한참 힘든 LG전자에 어떤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다면, 그 또한 답 구할 곳은 개발자의 열정뿐일 게다. 경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