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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 무늬의 비밀 풀다...도깨비를 용으로 바로잡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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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호 15면

1. 월지출토 용연와

이 책은 뜨겁다. 그 예술적 열정과 학문적 전투성은 자못 감동적이다. 『한국 미술의 탄생:세계 미술사의 정립을 위한 서장』(솔, 2007, 9만원)이라는 야심 찬 제목 역시 책의 온도를 상승시키는 데 일조한다. 기성학계에 대한 매서운 질타도 여러 번이다. 다른 미술사나 미술 이론서와 달리 이 책에는 ‘나’라는 주어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나’는 강우방 선생이다. 그를 한국 최고의 미술사가로 뽑는 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29> 강우방의 『한국미술의 탄생』

책에서 그는 여러 번 “내가 했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놀라운 흡인력으로 자신의 작업 과정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관찰하고, 기록하고, 사진 찍고, 백묘 뜨고, 채색 분석하고, 다시 채색 분석한 것을 논문으로 씀으로써 비로소 한 작품의 조사가 끝나는 것”이다. 조심스레 채색을 하면서 무늬의 구조를 밝히는 채색 분석 작업에만도 10여 일이 걸리기도 한단다. 이게 끝이 아니다. “그런 과정을 수천 번, 수만 번 거쳐야 비로소 한 작품의 본질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의 의미는 단 한 번에 잡히지 않는다. “여러 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해 서서히 이루어지다가 홀연히 그 궁극의 본질”에 이르게 된다. 이 책에는 이러한 열정적인 몰입의 과정과 발견의 기쁨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2 무령왕비 관 장식 사진 솔 출판사 제공

2007년 발간한 이 책에서 저자는 ‘문양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겠다고 선언했고, 수년째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올해로 고희를 맞은 그가 운영하는 일향미술연구원 홈페이지에는 거의 매일, 일기를 쓰듯이 연구 과정에 관한 글이 올라온다. 『한국 미술의 탄생』이란 제목은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무늬’의 의미를 밝히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국 미술을 새롭게 분석했다는 뜻이다. 왜 무늬가 중요한가? 무늬란 단지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신 혹은 신성 혹은 영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회화적 요소들이 당대 특수한 상황의 산물인 반면, 무늬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형미술에 지속”돼 왔으며, 동시에 여러 나라의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그의 긴 학문적인 생애에서 극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고구려 벽화의 재발견이었다. 고구려 벽화의 80%가 무늬다. 고구려 벽화에서 발견된 무늬(영기문·靈氣文)들은 금속공예, 기와, 향로, 도자기, 불상의 광배, 불화, 목조건물의 공포와 단청 조각, 불화, 심지어는 복식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한국 미술의 심오한 상징 세계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늬의 상징체계를 밝힘으로써 기존의 신라 문화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고구려 문화가 우리 민족 문화의 근원적인 뿌리라는 것을 밝힌다.

그의 이론의 중심에는 동양적 세계관, 우주관을 집약한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이 자리 잡고 있다. 무늬는 우주에 충만한 기, 생명, 영성, 도, 비로자나 등을 상징하는 것이다. 영기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기에 오히려 여러 형상이 가능하다.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영기의 싹’ 무늬다. 이전에 콤마무늬라고 불리던 고사리 싹 같은 모양의 ‘영기의 싹’ 무늬는 추상적인 형태나 구상적 형태로 복잡하게 발전해 간다. 당초문, 운문, 팔메트(종려나무 잎을 부채꼴로 편 모양) 무늬라 불리는 것들은 모두 이런 영기의 싹 무늬가 발전해 나간 형태다. 용, 봉황, 기린, 해태 등 신령스러운 동물들과 부처와 보살상은 이런 영기문의 고도의 발전한 형태이거나 영기 그 자체의 상징이다. 그가 “동양 우주관을 응축하여 표현한 세계 최고, 세계 최미의 조형작품”이라 뽑는 ‘백제 금동 대향로’는 영기에서 용이 탄생하고, 용의 입에서 연꽃이 화생하고, 그 위로 신선 세계가 나타나고 그 위에 또 다른 영기의 실체인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비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기화생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을 발간하고 나서 계속된 연구는 둥근 원 모양의 보주(寶珠)에 주목한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시작인 씨방과 관련 있다. 생명의 원천인 물에서 다양한 형태의 영기문이 생겨나고 이 영기문에서 용이나 보살의 형상이 생겨난다. 이렇게 완성된 영기문의 일종인 용이나 보살의 형상에는 다시 둥근 보주가 등장해 생명은 무한히 생성되고 순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기문의 해독은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 더 나아가 올바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지금까지 귀면와(鬼面瓦)로 알려진 것을 그는 용면와(龍面瓦)라고 정정한다. 일본 학자들의 논의를 따라 막연하게 귀신의 얼굴이라 불러왔는데, 영기화생론에 입각한 분석에 따르면 이것은 영기의 총화가 물짐승으로 표현된 용의 얼굴이다. 옛날의 목조건물에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큰 화재였다. 화마를 막기 위해서 물을 상징하는 용이 건물을 장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분석이 가능한 것은 그가 “조형미술의 모든 장르에 관심을 가지고” 두루 섭렵했으며 무엇보다 도가사상과 불교사상에 관한 고전들을 평생 지니고 다니고 베개 옆에 두고 읽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자기 이론에 대한 자신감은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자세를 가능하게 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한국미술사 연구 방법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거나, 일본의 연구 결과로 우리 문화를 바라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대주의적인 태도는 한국 미술을 보는 독자적인 방법론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자신감은 한국 미술사를 뒤덮고 있던 무기력과 눈치 보기를 한 방에 날려버린다. 우리는 이것을 원했다. 더 나아가 문양학적 방법을 통해 그는 중국 미술과 일본 미술, 나아가 세계 미술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무늬는 비단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등 아시아권뿐만 아니라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스 문화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무늬의 보편성은 무늬를 해독해낸 이론의 보편성을 의미하므로 그의 이론은 세계 미술을 이해하는 데에도 유효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세계 미술사의 정립을 위한 서장’이라는 야심 찬 부제도 이래서 가능한 것이다. 이런 기존의 한국미술사 관련 책에서 볼 수 없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는 책의 온도를 급상승시킨다.

2004년 그는 한 책에서 “나의 내면 세계의 정신적 편력에는 종착역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정년퇴직 후에 강우방 선생의 활동은 더 왕성해진 것 같다. 『한국 미술의 탄생』이 발간된 지 벌써 4년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후속 편을 기다리고 있다.


이진숙씨는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 작품에서 느낀 감동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미술의 빅뱅』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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