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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가 빚은 ‘푸른 탑’ 삼형제 … 이게 바로 산(山)이로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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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과 가장 가까운 땅 칠레 파타고니아. ‘지구의 끝’이란 별명답게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청정 자연을 간직한 곳이다. 다큐멘터리 채널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지구 10대 낙원으로 꼽은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도 파타고니아 안에 있다. 토레스(Torres)는 스페인어로 ‘탑’이고, 파이네(Paine)는 ‘푸른색’을 의미하는 파타고니아 토착어다.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즉 ‘푸른 탑’이란 이름은 국립공원 북측에 우뚝 솟은 삼형제봉에서 따왔다. 북봉·중앙봉·남봉, 이 세 개 준봉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다. 그 주위로 1200만 년 전 지각변동으로 생긴 땅을 빙하가 훑고 지나가며 형성된 피오르드 지형이 드라마틱하게 어우러지고, 옥빛의 빙하 녹은 물이 표표히 흐른다. 한국에서 이틀에 걸쳐 가야 하는 힘겨운 여정도 이 절묘한 비경 앞에서는 씻은 듯이 잊히고 만다.

글ㆍ사진=신동연 선임기자

그란데 폭포의 우렁찬 굉음을 들으며 토레스 델 파이네의 준봉을 바라봤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위용이 황홀했다.

# 자연이 빚어낸 에메랄드빛 빙하

한국에서 칠레로 향하는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미국 LA와 칠레 산티아고를 경유해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남동쪽에 위치한 푼타아레나스 공항까지 가는 데 비행시간만 꼬박 25시간이 넘게 걸렸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조용하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항구 도시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 120㎞가량 떨어져 있다. 남미 대륙 최남단에 칠레 파타고니아가 있고, 그 파타고니아 남쪽 끝자락에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이 있다.

 남반구는 여름이라 기온이 영상인데도 칼바람이 매서웠다. 현지 가이드가 방한용 재킷·털모자·장갑을 권한 이유가 있었다. 오전 8시 유람선이 출발했다. 배가 물살을 가르며 재빠르게 나아갔다.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폭포수가 우렁차게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한 시간 뒤 거대한 빙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높이 2035m의 발마세다 산이었다. 자욱한 구름 사이로 새하얀 봉우리가 고고한 자태를 드러냈다. 날씨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는데도 안개가 두껍게 끼어 시야가 흐렸다.

세라노 빙하. 발마세다 산꼭대기에서 쏟아져 내린 만년설이 에메랄드 빛으로 얼어붙었다.

 울티마 에스페란자 해협과 연결된 세라노 강 어귀에서 하선했다. 숲에 난 오솔길을 따라 발마세다 산의 빙하 계곡을 30분간 숨이 차도록 올랐다. 이윽고 에메랄드빛이 형형한 세라노 빙하가 나타났다. 발마세다 산 꼭대기에 수억 년간 쌓인 눈덩이가 일제히 산허리로 무너져 내린 형세다. 감탄이 나올 만큼 풍광이 기가 막혔다.

 산에서 내려와 조디악(바닥이 평편한 소형 고무보트)으로 갈아타고 물길을 따라 상류로 더 거슬러 올라갔다. 1시간쯤 지났을까, 병풍처럼 둘러쳐진 설산 너머로 만년설에 뒤덮인 준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이드가 “저기가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이라고 소개했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몸을 말리며 드넓은 파타고니아 초원에 첫발을 내디뎠다.

# 빙하 아래엔 한가롭게 풀 뜯는 구아나코

울티마 에스페란자 해협의 작은 항구도시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목가적인 풍경.

잿빛 초원을 조금 걷다 보니 작은 부락이 나왔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통나무집에 들어섰다. 근방에서 흔히 보이는 농가였는데, 주인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장작불에 구운 양고기와 빵을 내왔다. 식전주로 칠레와 페루의 대중적인 칵테일 ‘피스코 사우어’를 마셨다. 선인장을 원료로 한 독주에 계란 흰자와 설탕을 섞은 것인데, 한두 모금 홀짝이다 보니 이내 몸이 뜨끈해졌다.

 국립공원 안에서는 캠프장에서도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 2005년 한 부주의한 체코인 배낭여행자가 강풍이 불던 날 휴대용 스토브를 사용하다 산불을 낸 다음 규제가 더 강화됐다고 한다. 대신 몇몇 농가에서 여행객을 상대로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다. 국립공원 안팎의 산장과 호텔 근처에서 이런 농가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국립공원 남쪽 출입구에 도착했다. 입장료로 칠레 페소 1만5000달러(약 3만원)를 내고, 삼림관리위원회(www.conaf.cl)에 일정을 신고했다. 규정 탐방로를 이탈하면 엄벌에 처한다고 한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 자주 만난 구아나코. 야생 라마의 일종이다.

 산기슭을 따라 검은 흙길을 내처 오르다 보니 새하얀 준봉이 가까이 다가왔다. 야생 라마의 일종인 구아나코 무리가 길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 야생동물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슴처럼 생긴 구아나코나 회색여우 등 희귀 야생동물도 여기선 흔하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은 1978년 유네스코 생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페호 호숫가에서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청명한 수면이 햇살을 받아 옥빛으로 반짝였다. 여기의 호수는 모두 이렇게 물색이 진하다. 빙하에 침식된 암석 가루가 다량 함유돼 있어서라고 한다. 야생화가 소담스레 핀 호숫가에 가만히 앉아 있노라니 영원히 시간이 멈춘 듯 평온해졌다.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멀찍이 토레스 델 파이네의 검은 암봉이 나타났다. 그란데 폭포의 기운찬 굉음에 힘입어 전망 좋은 구릉 위로 서둘러 올라갔다. 잠시 뒤 박력 넘치는 자연의 조각품 토레스 델 파이네가 눈앞에 위용을 드러냈다. 빙하 계곡과 호수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황홀경을 자아냈다.

 영국의 여류 탐험가 플로렌스 딕시는 1880년 이 삼형제봉을 이집트 태양신앙의 상징 오벨리스크에 빗대기도 했다. 정말 그런가 하고 들여다봤더니 오히려 한자 ‘山(산)’과 더 닮았다. ‘山’은 중국인이 자기네 산을 본떠 만든 상형자다. 지구 반대편 칠레의 산도 같은 꼴이라니 어쩐지 자연의 경이를 엿본 기분이었다.

● 여행정보

한국에서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여정은 결코 짧지 않다. 한국∼칠레 사이에는 비행기 직항편이 없기 때문에 미국·캐나다·프랑스·남아공 등지를 경유해 우선 칠레 산티아고로 가야 한다. 산티아고에서 비행기로 3시간을 더 가면 비로소 국립공원 인근의 푼타아레나스 공항에 다다른다. 여기서부터는 보통 버스를 이용하는데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찾는 여행객이 흔히 전초지로 삼는 푸에르토 나탈레스까지는 버스(하루 10편 이상 운행)로 3시간 거리다. 푸에르토 나탈레스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120㎞가량 떨어진 국립공원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 8편 운행된다(파타고니아 관광정보 www.patagonia-chile.com).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은 1년 내내 운영되지만 트레킹을 하기에는 남반구 여름인 12~2월이 가장 좋다. 날씨가 변덕스럽고 비·바람·안개가 잦은 편이라 방한·방수복을 챙겨야 한다(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www.torresdelpa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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