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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일의 시시각각

한나라당이 망하는 이유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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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상일
논설위원

한나라당 쇄신 연찬회는 ‘한나라당스럽게’ 끝났다. ‘한나라당스럽다’고 하는 건 이 당이 거의 매번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적당주의로 일을 매듭지어왔기 때문이다. 엊그제 열린 연찬회에서 많은 이들이 많은 얘기를 했지만 결론은 ‘그냥 가자’였다. “홍준표 대표 체제로 내년 총선을 치르면 참패하는 만큼 당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대안이 없다. 현 체제가 쇄신을 잘하면 된다”는 목소리에 제압당했다. 현상 유지론을 펴면서 홍 대표 체제를 거들고 나선 이들은 친박근혜계였다.

 친박은 왜 홍 대표를 보호할까. 그건 박근혜 전 대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홍준표 불가론’을 펴는 이들은 ‘박근혜 조기 등판론’을 주장한다. “홍준표로 총선을 치러선 안 되니 박근혜가 나서야 한다”는 거다. “총선에서 지면 박근혜가 대통령 되는 게 어려워지고, 설사 대통령이 되더라도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할 테니 박근혜가 지금 등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하지만 친박의 생각은 다르다. “박근혜가 나섰다가 총선에서 지면 대선 도전이 더 어렵게 된다”고 우려한다.

 친박이 홍 대표를 감싸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거친 기질, 야무진 입이 쓸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홍준표가 누구인가. “나는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고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고 종종 말하는 이다. 2007년 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해 이명박(MB) 후보를 가장 괴롭혔던 인물이다. “이 후보는 흠집투성이로, 대통령 자질이 없다”며 수없이 공격했던 사람이다. 친박계가 기대하는 건 그런 모습이다. 당이 이 대통령과 차별화하는 일에 홍 대표가 앞장서 주길 바라는 것이다. “총선에서 표를 얻으려면 이 대통령의 잘못을 비판해야 하는데 홍준표만큼 악역을 잘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게 친박 의원들이 하는 얘기다.

 홍 대표가 “질풍노도의 쇄신을 하겠다”고 하는 건 친박의 뜻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벌일 ‘쇄신 굿판’엔 반(反)MB·비(非)MB정책이 난무할 것이다. MB의 때가 묻은 인사들이 ‘인적(人的) 쇄신’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친박의 우산 밑에서 대표 권한을 누리며 총선 공천에서 ‘내 사람’을 좀 챙길 수 있다면 그로선 괜찮은 장사를 하는 셈이다. ‘녹수(綠水) 갈 제 원앙 가듯’ 친박과 홍 대표가 사이 좋게 움직이는 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탓이다. 그럼 그게 당에도 이로울까. 야권은 뭉치면서 판을 바꾸려 하는데 한나라당은 고작 현 체제 안에서 개량만 하려 한다면 민심은 어느 쪽으로 쏠릴까. 홍 대표가 친박의 지원 아래 MB와 다른 정책을 많이 내놓는다 한들, 사람을 많이 바꾼다 한들 그걸 진정한 쇄신이라고 다수의 국민이 인정해 줄까.

 연말이나 연초 야권에선 거대 통합신당의 대표직을 놓고 한명숙 전 총리, 박지원 전 민주당 원내대표, 문성근 ‘국민의 명령’ 대표 등이 나서 승부를 겨룬다. 이들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데려오겠다”는 등의 공약을 하며 흥행 열기를 고조시킬 것이다. 이때 한나라당이 할 수 있는 건 뭘까. 홍 대표 주도로 ‘정책 바꾸기’나 ‘물갈이 공천 작업’밖에 더 하겠는가.

 ‘반(反)홍준표’파가 박근혜 전 대표를 당의 전면에 내세우려고 하는 데엔 이런 걱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안 교수가 야권을 지지할 가능성에 대비하자는 뜻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친박은 그들의 저의를 의심한다. “박근혜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한 술수”라고 보는 것이다. 정몽준·정두언 의원 등 틈만 나면 박 전 대표를 공격했던 이들이 ‘박근혜 등판론’을 주장하니 그럴 법도 하다. 친이계 일각에선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리는 걸 고소하게 여기는 만큼 친박의 의심은 짙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비극이다. 자기네끼리도 못 믿는데 쇄신인들 제대로 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물갈이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4년 전의 공천 파동 재연으로 당이 쪼개질지도 모른다. 파벌 간 불신은 뿌리 깊지만 그걸 제거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당이 망하는 길로 가는 이유 중 하나다.

이상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