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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침몰할 배에서 시간 허비하기엔 남은 인생 길지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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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개선문에서 샹젤리제를 따라 300m쯤 걸어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조르주 생크(George Ⅴ)가(街)가 나온다. 길 이름을 딴 조르주 생크 호텔이 있던 거리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호텔은 파리에 있는 별 다섯 개짜리 럭셔리 호텔 중 하나에 불과했다. 2008년 사우디 왕가 출신의 세계적 갑부인 알 왈리드 왕자가 인수하면서 격이 달라졌다. 알 왈리드는 세계적 호텔 체인인 포시즌스에 경영을 맡기고, 이름도 포시즌스 조르주 생크로 바꿨다. 지금은 파리에서 제일 비싼 호텔이다. 가장 저렴한 스탠더드룸의 1박 요금이 895유로(약 136만원)로 파리의 웬만한 스튜디오 한 달치 집세와 맞먹는다.

 지난달 파리에서 누굴 만나려고 했더니 포시즌스 호텔 바에서 보자는 전갈이 왔다. 내가 필요해서 만나자고 해놓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난감했다. 지갑 속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리다 큰맘 먹고 호텔로 갔다. 호텔 분위기와 내 행색의 부조화가 처음엔 어색했지만 종업원들의 친절 덕분인지 곧 적응이 됐다. 한 시간에 걸친 인터뷰 끝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사적인 영역으로 넘어갔다. 40년 경력의 언론인 출신인 그는 올 초 프랑스 일간지인 ‘프랑스 스와르(France Soir)’의 사장직 제의를 받았지만 고사했다고 고백했다. “침몰할 배에서 시간을 허비하기엔 남은 인생이 길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프랑스 스와르는 한때 프랑스에서 제일 잘나가는 신문이었다. 전성기 때는 하루 150만 부를 발행, 유럽 대륙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9만 부로 쪼그라들었다. 법정관리를 거쳐 지금은 러시아 재벌인 알렉산드르 퓨가체프 소유로 넘어가 있다. 최근 퓨가체프는 부채를 떠넘기는 조건으로 단돈 1유로(1520원)에 신문을 매각하겠다고 처분의사를 밝혔다. 매달 100만 유로씩 쌓이는 적자를 줄이기 위해 인쇄를 중단하고, 인터넷 판으로만 발행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67년 전통의 종이신문 프랑스 스와르가 사라질 운명을 맞았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갈수록 신문을 외면하고 있다. 종이신문의 위기는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 현상이다.

 어제 JTBC를 비롯해 종편 4사가 일제히 개국했다. 각자 여러 가지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공통점은 위기를 맞은 종이신문들의 생존 전략이란 점이다. 달라진 미디어 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의 표현이다. 프랑스 스와르의 수모는 남의 일이 아니다.

 포시즌스에서 만난 프랑스의 ‘선배’는 “멀리서 온 동지를 대접하는 것은 예의”라며 굳이 계산을 고집했다. 한편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아직도 신문의 미래를 믿고 있는 둔감한 후배에 대한 연민의 표시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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