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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쫄지마, MB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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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지난달 28일 밤 광화문 광장은 가관이었다. 100명이나 될까 말까 한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대가 바리케이드 쳐진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가려고 6000여 경찰을 밀어붙였다. 시위대는 기세등등했다. “왜 못 들어가게 합니까. 경찰 책임자는 대답하세요”라는 여성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경찰 책임자는 안 보이고 말 못하는 젊은 전경들은 긴장한 눈빛만 껌뻑인다. 시위대가 삼삼오오 흩어진 뒤에도 광화문 사거리는 경찰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무섭길래. 시위대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에서 김어준이 즐겨 외치는 ‘쫄지마’라는 말이 떠올랐다. ‘가카(이명박 대통령) 헌정방송’을 표방하면서 대통령을 조롱해온 나꼼수는 반(反)MB세력들에 ‘쫄지마’라고 선동한다. 그런데 이날 광화문 풍경을 보면 ‘쫄지마’라는 위로를 받아야 할 쪽은 시위대가 아니라 현 정권인 듯했다. 얼마나 쫄았기에, 고만한 시위대에 광화문 바닥을 경찰로 도배해야 했는지.

 그런 점에서 지난달 30일 나꼼수의 여의도 콘서트는 더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경찰 추산 1만5000명, 주최 측은 5만 명이라는 인파가 추운 밤 여의도 광장에 모였으니 보통 위세가 아니다. 추위에 떨면서 몇 시간을 지키던 인파가 자리를 뜨면서 자발적 후원금을 3억원 넘게 남겼다. 콘서트 등장인물과 객석의 열광을 보면 정말 위협적일 만하다. 이날 주인공들은 FTA 반대에 앞장섰던 정치인들이다. 의사당에 최루탄을 터뜨렸던 민노당 김선동 의원은 말 그대로 ‘열사(烈士)’ 대접을 받았다. 이정희 민노당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에 올라 다시 아침이슬을 부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다. 2008년 촛불 당시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불렀다’는 대통령의 고백은 시위대에 아첨한 굴욕의 상징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크다. 그러나 얼마나 대표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의사당 최루탄에 환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FTA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여론이 다수다. 문제는, 현 정권이 이런 소수 진보·좌파에 끌려간다는 사실이다. 한나라당은 지난 10월 말 FTA 비준 협상을 하면서 민주당이 요구한 내용을 사실상 모두 들어주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만 제외하고. ISD의 경우도 발효 직후 협상한다는 최대의 양보조건을 달았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런 양보 이후에도 시종일관 야당에 끌려다녔다. 결국 최루 가스를 맡으며 단독 처리했다. 줄 것 다 주고, 뺨 맞을 것 다 맞았다.

 FTA로 피해 볼 농축산업을 충분히 지원하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지워진, 지나친 예산부담은 남는다. 예산당국은 당시 한나라당이 양보한 만큼 재정지원을 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다시 따져봐야 한다. 전력부족으로 전기료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값싼 농업용 전기요금을 도정시설이나 가축분뇨처리시설 등으로 확대하겠다는 정책이 얼마나 타당한지.

 더 큰 문제는 복지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복지를 늘리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방향과 속도는 신중히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정부와 집권여당이 야당에 뒤질세라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지난달 29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경제자문회의에서 선언한 무상보육의 경우가 그렇다. 원래 무상복지는 민노당 정책이었는데, 민주당이 채택하고, 급기야 지난 8월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 이후 한나라당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선거철 정당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살림을 맡은 정부는 신중해야 한다. 대통령이 선언한 무상보육은 현재 소득 하위 70%에 대한 지원을 상위 30%까지 확대하는 정책이다. 이는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 당시 “부유층 무상급식은 포퓰리즘”이라던 청와대의 입장과 정면 배치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매년 10%씩 확대하려던 정책인데, 갑자기 100% 전면 실시를 선언했다. 방향은 오락가락이고, 속도는 전광석화다. 결과적으로 남게 되는 부담은 역시 예산이다. 없는 돈을 만들어야 한다. 나랏빚을 늘리든지, 다른 예산을 깎아야 한다. 복지는 공짜가 아니다.

 정부가 이렇게 쫓기듯 정책을 이끌어가면 안 된다. MB 정부는 아직 1년 넘게 남았다. 복지를 늘리더라도 정치판에 휘둘려선 안 된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직전 대통령은 “선거 치르는 사람은 오늘이 당장 급하다는 것 이해하지만, 대한민국이 제대로 가도록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마음 자세는 갈수록 절실해질 것이다. 쫄면 안 된다.

오병상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