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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떨어져 흙이 되어도 우리 사랑 내 서늘한 가슴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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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호 16면

뚜아에무와 3집(사진 위)과 윤도현 1집. 사진 가요114 제공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11월을 보내는 마음은 여느 계절을 보내는 마음과는 다르다. 이제 정말 한 해가 끝나가는구나. 생명의 색깔을 뿜었던 꽃도, 풀들도 모두 시드는구나. 이렇게 모든 것들이 소멸해 가는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우수수 떨어진 길바닥의 낙엽을 보게 되는 계절이다. 11월의 마지막 휴일에 생각나는 노래 몇 곡을 골라본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35> 늦가을을 보내는 노래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비가 온대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은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세월이 가면’, 1956, 박인환 작시, 이진섭 작곡)

지금은 1970년대 초의 박인희 목소리로만 기억되지만, 애초에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테너 임만섭이었다. 56년 명동의 어느 대폿집에서 박인환의 시에 방송인 이진섭이 곡을 붙여 임만섭이 처음으로 노래했다. 50년대 ‘명동백작의 시대’를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거론되는 노래다. 방송용으로 쓰기 위해 녹음한 것은 당시 성악과 학생이던 최양숙이었고, 그 후 많은 사람이 부르며 살아남은 노래이니 작품이 준 감동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세월과 함께 소멸하는 것과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세월이 가면’은 이것을 노래한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부분을 부를 때에 박인희의 목소리는 늦가을의 서늘한 냄새를 풍긴다.“샛노란 은행잎이 가엾이 진다 해도 / 정말로 당신께선 철없이 울긴가요 / 새빨간 단풍잎이 강물에 흐른다고 / 정말로 못 견디게 서러워하긴가요 / 이 세상에 태어나 당신을 사랑하고 / 후회 없이 돌아가는 이 몸은 낙엽이라 / 아아 아아아아아 아아 아아아아아 / 떠나는 이 몸보다 슬프지 않으리”(문정선의 ‘나의 노래’, 1971, 신우철 작사, 김강섭 작곡)

내가 문정선의 노래 중에서 ‘파초의 꿈’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60년대 스탠더드팝의 계보를 잇는 문정선은 여자 가수로서는 매우 드물게 감상성이나 교태를 제거한 씩씩한 목소리를 지녀 청년문화 시대에 사랑받던 가수였다. 라디오드라마 주제가였던 이 노래는, 낙엽 지는 가을과 함께 이별을 맞아야 하는 사람의 슬픔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과도한 슬픔을 절제하면서도 ‘이 세상에 태어나 당신을 사랑하고 후회 없이 돌아간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 사랑은 자신의 인생을 건 사랑이었다. 그 슬픔의 무게감과 이를 견뎌내는 절제를 문정선의 꿋꿋한 목소리가 잘 받아내고 있다.

“마른 잎 떨어져 길 위에 구르네 / 바람이 불어와 갈 길을 잊었나 / 아무도 없는 길을 너만 외로이 가야만 하나 / 누구를 못 잊어 그렇게 헤매나 / 누구를 찾아서
한없이 헤매나 / 아무도 없는 길을 너만 외로이 가야만 하나 / 마른 잎마저 멀리 사라지면 / 내 마음 쓸쓸하지 / 바람 불어와 멀리 가버리면 / 내 마음 쓸쓸하지
/ (하략)”(장현의 ‘마른 잎’, 1973, 신중현 작사·작곡)

신중현의 노래는 록이 만들어내는 경쾌함, 김추자가 뿜어내는 요염함과 에너지 등으로 인상 지워져 있지만, 마음 밑바닥의 깊은 우울을 드러내는 노래가 적지 않다. 주로 장현의 노래로 불려진 ‘미련’ ‘나는 너를’ 같은 노래들이 그러한데, ‘마른 잎’이 그 우울로는 가장 깊은 노래라 할 만하다. 장현은 신중현 사단 중 가창력이나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신중현이 가장 아끼는 가수였다고 알려져 있다. 어눌하면서도 깊은 우울을 드러내는 장현의 목소리는 신중현 자신의 독백
의 느낌을 구현하는데, 그런 점에서 신중현이 자신의 페르소나로 선택한 가수가 아닐까 싶다. 가사는 비교적 평범하지만, 신중현의 독특한 선율, 한 소절이 끝난 후 여백을 채우며 목소리와 대화하듯 노래하는 클라리넷, 낮게 깔리며 리듬을 잡아주는 베이스기타와 날카로움을 유지해 주는 클라이맥스의 키보드가 어우러져 늦가을의 우울과 허무함을 드러낸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걸 보네 /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윤도현 밴드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1994, 김현성 작사·작곡)

우울한 늦가을의 노래로 이토록 착하고 건강한 노래가 한 곡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이등병의 편지’의 창작자 김현성의 작품으로 담담하고 사려 깊은 마음에서 두 노래는 세트를 이룬다. 나무들은 지난겨울에 그랬듯 올겨울에도 엄혹한 눈보라를 견딜 것이다. 이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들은, 이렇게 제각기 이렇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고, 이렇게 홀로 서 있는 꿋꿋함이 아름답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 대중가요 관련 저서로『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광화문 연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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