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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왕조의 종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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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리비아 최고지도자 카다피의 후계자였던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은 체포되자 “총으로 머리를 쏴 달라”고 요청했다 한다. 살려 달라고 애원했던 카다피와는 다른 모습이다. 신라의 마지막 장면이 겹쳐진다. 『삼국사기』 신라 경순왕(敬順王) 9년(935)조는 항복하려는 경순왕에게 왕자가 “나라의 보존과 멸망은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이라면서 결사항전을 주장했다고 전한다. 경순왕이 끝내 시랑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주어 항복하게 하자 왕자는 울면서 개골산(皆骨山·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다가 죽었다. 마의태자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같은 기사를 실으면서 소제목을 경순왕이 아니라 김부대왕(金傅大王)으로 적었다. 고려에서 정해준 경순(敬順)이란 시호 대신 김부라는 휘(諱)를 그대로 쓴 일연의 역사관이 돋보인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들의 마지막 장면은 한결같이 비장미가 없다. 백제 의자왕이나 고구려의 보장왕도 모두 포로의 길을 택했으며, 고려의 마지막은 공손하게 양보한 공양왕(恭讓王)이다. 조선의 선조는 임란이 발생하자 나라를 버리고 만주로 도주하는 요동내부(遼東內附)를 꿈꿨다가 “대가(大駕)가 동토(東土·조선)를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라는 류성룡의 반대로 저지되었다.

 반면 명나라 의종(毅宗)은 이자성의 군대가 자금성으로 밀려들자 “나의 백성이 괴로움을 당하는구나[苦我民耳]”라고 탄식하고 태자와 영왕(永王)·정왕(定王)은 명(明)을 재건하라고 보낸 후 황후 주씨(周氏)와 후비들을 자결시켰다. 『명사(明史)』 ‘장평(長平)공주 열전’은 의종이 장평공주를 찾아가 “너는 어찌 내 집에서 태어났느냐”라면서 내리쳐 왼쪽 팔이 끊어졌다고 전한다. 의종은 여섯 살 소인(昭仁) 공주마저 벤 후 자결했다. 『명사』 ‘장렬제(莊烈帝) 본기’는 의종이 “짐은 죽어서 조종(祖宗)을 볼 면목이 없으니 관을 벗기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라”고 유언했다고 전한다. 복명(復明) 운동이 끈질겼던 것은 의종의 이런 장렬한 최후 때문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英王·영친왕)이 1919년 유럽·미주 지역을 순방하면서 느낀 바를 적은 수첩이 고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유럽·미주에 대한 감회가 아니라 탈출해 망명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은 입헌군주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