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특파원
지난 주말 세미나 참석 때문에 들른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는 구경 온 방문객들에게 1인당 7파운드(1만25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영국 총리 13명을 배출한 명문 칼리지인 이곳은 영화 ‘해리포터’에서 마법학교 식당으로 연출된 대형 홀 때문에 관광 명소가 됐다. 학교 내부엔 기념품 상점도 크게 차려져 있다. 유명세를 철저히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이다.
반 년 전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이 열린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입장료는 16파운드다. 알아보니 1997년에 유료화가 된 뒤 꾸준히 값이 올랐다. 국립묘지 방문객에게 돈을 물리는 셈이다.
20년 전 처음으로 영국 땅을 밟았을 때만 해도 박물관·종교 시설·유명 학교 등 대부분의 주요 관광지는 공짜거나 관리비 충당 목적으로 보이는 적은 금액만 받았다. “언제든 와서 영국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확인하라”고 큰소리 치는 것 같았다. 화려한 과거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몇몇 국립 박물관을 제외하면 무료 입장을 경험하기 힘들다. 체면 따지지 않고 돈벌이에 나선 느낌이다.
영국의 무선 통신은 선진국 중 최악 수준이다. 수도 런던의 지하철에서는 예외 없이 휴대전화 연결이 안 된다. 골목 안쪽이나 건물 내에서 통화가 안 되는 곳도 많다. 대학 도시인 옥스퍼드에서도 여러 차례 불통 상태에 빠졌다. 이웃 나라 프랑스에 비해서도 훨씬 열악하다. 파리 지하철에서는 최소한 전화가 끊기지는 않는다. 인터넷 속도는 프랑스보다 약간 빠른 느낌이지만 광범위한 특정 지역에 서비스가 중단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산업 혁명으로 전 세계의 기술 혁신을 이끈 나라라는 사실이 도저히 실감이 안 된다.
무선 통신 낙후는 통신 사업자들이 투자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용자들이 이를 별로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는 데에 있다. 영국인에게 통신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면 “꼭 지하철에서까지 통화를 해야 하나” “인터넷, 그래도 많이 빨라졌는데…” 등의 반응이 돌아온다. 끊기지 않는, 빠른 것을 경험해보지 않아 결핍을 인지하기 힘든 모양이다.
최고의 명문 대학이 관광 수입에 혈안이 돼 있는 인상을 주고, 산업화의 원조국답지 않은 통신 서비스에 국민들은 별 불만이 없다. 기개를 잃고 무기력증에 빠진 영국의 단면들이다. 이틀 전 이 나라의 16~24세 실업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청년실업률 21.9%)는 통계가 발표됐다. 장기 불황을 예고하는 분석들도 잇따르고 있다. 힘 빠질 만도 하다.
그런 가운데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우리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자신감”이라고 외친다. 유럽을 휩쓸고 있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정신력과 의지로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의 바람대로 영국인들이 우선 원기부터 되찾기를 기대해 본다.
이상언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