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야호, 수능 끝났다 … 그런데 왜 이리 허탈하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1면

수능이 끝난 후에는 시험 준비로 소진해 버린 에너지를 보충하고 그간 챙기지 못했던 건강 관리를 시작해야 한다. [게티이미지]

지난해 11월 수학능력시험을 치렀던 김예린(가명·19·여)양. 김양은 고등학교에 다닌 3년 동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주변에서 완벽주의자라고 부를 정도로 자기 관리도 철저했다. 하지만 수능 가채점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이때부터 김양은 변하기 시작했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죄책감 때문인지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잠을 자지 않고 식사를 거르는 일도 다반사였다. 보다 못한 엄마가 김양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진단명은 심각한 우울증. 김양은 한 달 동안 입원해 심층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았다.

 
“12년 공부 한 번에 끝나” 일탈에 빠지기도

수능 신드롬의 계절이다. 초·중·고 12년 동안 공부한 결과가 시험 한 번에 끝나다 보니 성적과 관계없이 허탈감을 느끼는 학생이 늘어난다. 불안·우울증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자신을 비관하며, 열등의식에 빠지기도 한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강은호 교수는 “지난해 수능시험 당일 경찰이 집중 단속을 했더니 단 2시간 만에 음주·흡연 청소년이 2700여 명이나 적발됐다는 점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며 “수능 후 좌절감과 허탈감이 극에 달해 정신건강이 황폐화되는 시기”라고 말했다. 충동적 자살 시도가 늘어나는 것도 이즈음이다.

 상담건수도 확 증가한다. 한국청소년상담원에 따르면 11월 평균 상담건수는 다른 달에 비해 10% 이상 많다. 청소년 우울증 환자도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10년 우울증으로 병원에서 치료받은 10대 청소년은 2만3806명으로 2006년보다 15.3%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청소년 인구가 1.1% 늘어난 것을 고려하면 심각한 증가세다.

수면장애·공허감으로 병원 찾아

수능 후유증은 심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몇 년간 계속된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생체 방어기전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생활 리듬이 깨지고, 면역기능이 저하되면서 큰 병을 앓기도 한다.

 기대했던 성적이 나오지 않은 학생은 처음에 멍한 상태가 된다. 다음으로 분노·우울·죄책감이 혼재돼 나타난다. 이 단계가 지나면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해소기에 접어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연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완벽주의거나 생애 처음으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으면 의욕상실과 함께 수면장애·식욕변화 같은 갖가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수능 성적이 좋아도 공허감이 찾아온다. 부산에 살고 있는 이성권(가명·19) 군은 지난해 원하던 점수보다 성적이 잘 나왔다. 하지만 이 군은 일종의 무기력증에 빠졌다.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다. 병원 상담 때 이군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허탈하다”고 말했다. 몸이 너무 피곤하고 사람 만나는 것도 싫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병원에선 심층 상담을 권했다. 약물치료도 이어졌다. 강은호 교수는 “ 목표를 달성해도 그동안 과도하게 정신적 에너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의욕이 저하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의학계에서는 이런 증상을 ‘성공 공포증(Success Phobia)’이라고 부른다. 김군은 한 달가량 통원치료를 받고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족과 스킨십 늘리고 대화 많이 나눠야

수능 후유증도 몇 가지 요령을 알고 있으면 별 탈 없이 극복할 수 있다.

 먼저 가족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다. 가천의대길병원 이비인후과 차흥억 교수는 수능을 치른 아들과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고3 때도 주중에 선생님의 허락 아래 2박3일 동안 설악산을 다녀온 적이 있다. 차 교수는 “요즘 아이들은 강한 척할 뿐 오히려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며 “우울한 것 같을 때 미리 가족과 스킨십을 자주 하고 대화를 나누면 정신적인 지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우울 증상이 나타나면 정신과에 데리고 가서 함께 심리상담을 받을 계획도 세우고 있다. 먼저 대학에 간 두 딸의 수능 후유증을 본 후 이 같은 노하우가 생겼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수험생 자녀와 소통하는 것도 정신건강을 챙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경희대병원 가정의학과 원장원 교수는 올해 재수생이었던 아들과 모바일 서비스 ‘카카오톡’을 이용해 고민 상담을 해왔다. 1년 전 수능시험을 망치고 돌아온 아들을 봤을 때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원 교수는 “가끔 체조도 시키고, 뒷산 산책도 같이 가자고 문자로 권유하는 등 아들의 정신적 압박감을 줄여주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숙면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좋다. 잠을 잘 때 이어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하도록 해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축구·야구 같은 단체운동을 권하거나 새로운 경험을 쌓도록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좋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의 저자인 인천나누리병원 정신분석연구소 김혜남 소장은 “인생에 소중한 것은 정말 많다”며 “마라톤을 뛸 때 시작이 빠르다고 1등이 아니듯 인생은 길게 봐야 한다는 점을 꼭 강조하자”고 말했다.

권병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