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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향과 다르다고 법리 무시한 채 판결할 수는 없는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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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박시환 대법관이 지난 9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집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법관이 될 때 ‘나쁜 재판은 안 하는 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었다”고 밝혔다. [변선구 기자]

“대법원의 생명은 다양성이다. 법률적 쟁점을 통해 그 사회의 가치기준을 결정하려면 당대의 모든 고민이 전달돼야 하기 때문이다. 때론 개인적 소신과 맞지 않아도 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진보 사법의 아이콘(상징)’으로 불려온 박시환(59) 대법관이 오는 20일 6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대법관 생활을 하며 가졌던 고민들을 풀어놨다. 성악이 취미인 박 대법관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오묘한 조화’라는 아리아를 가장 좋아한다”며 “성악은 재판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했다. “배우면 배울수록 성취감을 주지만 한계 또한 느끼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터뷰는 지난 9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9층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 퇴임 소감은.

 “솔직히 지난 6년이 지긋지긋하다. 이제 홀가분하고 방학을 맞는 기분이다. 대법원에서 소수의 입장에 있었다. 패자들이 흔히 느끼는 서럽고 억울하고 분한 느낌이 들 때가 적지 않았다. 대법관이 그럴진대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 없는 사회의 소수자들은 그 설움과 억울함이 얼마나 클까 자주 생각했다. 다수자와 가진 사람들이 이들을 품어주고 배려하지 않으면 갈 데가 없다는 생각도 했다.”

 - 대법원 생활은 어땠나.

 “처음 임명됐을 때 어색하고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다른 (사법시험) 동기들에 비해 너무 일찍 대법관이 됐기 때문이다. 대법관으로서 나는 개혁, 진보, 소수의 이미지였다. 이를 재판에 어떻게, 어느 정도로 반영할지가 고민이었다. 6년 내내 부채감이 있었지만 소출물은 빈약하고 미약한 듯하다. 그런 역할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죄송스럽다. 하지만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판결에 반영되긴 하겠지만 법리를 무시하고 성향만으로 판결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 사법부 내 ‘진보의 대표’로 자리매김한 계기는.

 “사법연수원에 함께 다녔던 고교(경기고) 선배인 조영래(인권변호사) 형에게 어떤 법관이 돼야 하는지 묻기도 하고 스스로 이런 법관이 되자고 자문자답도 했다. 그 결과가 ‘나는 좋은 재판, 멋있는 재판을 할 자신이 없지만 나쁜 재판은 안 할 자신이 있다. 소극적으로나마 나쁜 재판은 안 하는 판사가 있다는 걸 보여주자’는 결심이었다.”

 - 판사 생활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하는데.

 “내 결심은 법관이 된 지 석 달 만에 시험대에 올랐다. 인천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1985년 6월 당직 근무 중 시위 학생 14명에 대한 즉심을 맡았다. ‘도로에 돌을 던진 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시위 학생 중 11명이 ‘그런 적 없다’고 부인했고 다른 증거도 없었다.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해 9월 영월지원으로 좌천됐다. 그 재판 이후 권위주의 정부가 법을 무리하게 적용해 통제를 하려는 시도에 계속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진보 대표’라는 낯선 자리에 내가 있었다.”

 -김지형 대법관 등 대법관 4명과 소수의견을 잇따라 내면서 ‘독수리 5형제’로 불리기도 했다.

 “비슷한 가치관, 성향을 가진 분들이 있어서 힘이 됐다. 양심적 병역 거부 사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부장판사 때 내가 처음 위헌 제청을 했던 사안인데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결정이 났고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도 유죄로 판결했다. 내가 대법관이 된 뒤에 유사 사건들이 계속 올라와 김지형·전수안 대법관 등에게 전원합의체에 올리는 건 어떤지 등에 대해 물어봤다. 그분들이 적절치 않다고 해서 시급한 구속 사건부터 처리하고 불구속 사건은 20여 건 쌓아뒀다. 언젠가 상황이 변하면 (무죄 취지로) 선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올해 초 다수의견이 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이 들어 현행 법률과 종전 판례대로 모두 처리했다.”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해 거듭 소수의견을 제시해 ‘좌 클릭 아니냐’는 비판도 받았다.

 “지난해 7월 말 실천연대 간부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북한을 그 자체로 단순히 반국가단체라고 판단해선 안 된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선고 후 두 달이 지나 연평도 사건이 터진 날 보도가 됐는데…. 개인적으로 국보법은 일단 폐지한 뒤 새로 만드는 것이 좋다고 본다.”

 -대법원 구성에 대한 견해는.

 “대법원 구성이 다양하지 않으면 사회의 다양한 견해가 두루 푹 삶아질 수 없다. 그 경우 일부의 대법원이지 전체의 대법원이 될 수 없다. 고위 법관 외에 남녀노소, 진보-보수, 다수-소수를 대변하는 다양한 직역과 경력자들이 들어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구성도 다양화하고 권한도 더 많이 줘야 한다.”

박시환 대법관이 2007년 9월 서울 서초동의 한 공연장에서 오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아리아 ‘오묘한 조화’를 부르고 있다. 성악 동호회 회원과 가족 등이 청중이었다고 한다.

 -진보 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았는데.

 “사실과 다른 오해도 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88년 일부 법관이 독서회 모임으로 시작했다. 세상 모든 일이 독서 모임으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는 출범 1년 후 참석했다가 좋아 보여서 그날 가입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우리법연구회 소속 법관이 법원행정처 요직에 발탁되기도 했으나 그건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과의 개인적 친분이 고려된 것이었다.”

 - 후보 매수 혐의로 재판 중인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과 고교 동기 아닌가.

 “3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대학(서울대 법대 72학번)도 동기다. 곽 교육감이 후보가 되기 전에 상의해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출마를 권유했었다. 이번 일을 보면서 숙명 같은 느낌도 들고, 그가 호되게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 지난 2월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의 상고를 기각할 때 심경은.

 “그 사건이 우리 부에 왔다고 해서 나만 안 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배당이 됐다. 이 전 지사하고는 안면이 없다. 기록상 원심을 파기할 사건은 아니었다.”

 -취미로 성악을 배우고 있다고 들었다.

 “14년 전부터 동호회 활동을 한다. 마음이 맞는 5~6명이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노래 연습한다. 성악은 직접 자기 목소리로 한다는 점에서 재미있다. 일단 성취감이 있다. 그러나 해보면 한계도 있다. 목소리의 한계도 있고, 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는데 목이 못 따라갈 때도 있다.”

 - 퇴임 후 계획은.

 “변호사 개업은 가능하면 안 할 생각이다. 로스쿨 교수로서 후학 양성하는 일을 해 볼까 생각 중이다.”

글=조강수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소수의견 가장 많이 낸 대법관
대법관 ‘독수리 5형제’ 박시환

1953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경남중·경기고·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사법시험 21회(79년)에 합격한 뒤 85년 3월 인천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법원 내 개혁 성향의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 서울지법 부장판사로 있던 2003년 9월 사법 개혁을 요구하며 사표를 낸 뒤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듬해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사건 대리인으로 참여했으며 2005년 11월 대법관으로 컴백했다. 김영란·이홍훈 전 대법관, 김지형·전수안 대법관과 함께 진보적 경향의 판결을 주로 내려 ‘독수리 5형제’로 불렸다. 역대 대법관 중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가장 많이 썼다. “기본권 보장과 소수자 보호 판례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 진보 성향에 치우쳐 정치적 논란을 키웠다”는 시각이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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