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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나눔의 지구촌’ 향한 한국인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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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우리 국민도 살기가 어려운 판에 남의 나라까지 도울 수 있겠는가.” “요즘처럼 국민경제가 엉망일 때 나라 체면치레하게 됐나.”

 이런 솔직한 감정표현이 당연하게 들리는 것이 오늘의 우리 실정이다. 그러나 개인의 인생행로와 마찬가지로 나라의 발전과정에서도 당장에 직면한 상황 처리뿐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과 방향을 바로 보는 지혜와 비전을 갖추어야 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해야 할 일을 늦추지 않고 시도하겠다는 국민적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경제발전 과정에서 우리보다 다소 뒤에서 걸어오는 나라들에 대한 지원도 외면하거나 늦출 수 없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제의 하나다.

 이미 우리는 세계화와 정보화의 고개를 넘어 하나가 되어버린 지구촌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아무도 이 운명의 굴레로부터 이탈(離脫)할 수는 없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와 과제는 그 규모나 심각성이 크면 클수록 지역이나 국가보다 지구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될 것들이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 민주화 노력, 지속적 경제발전, 환경파괴 저지 등은 21세기 지구촌 시민 모두가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어 함께 대처해야 될 공동의 과제다. 세계사의 주류에서 고립된 대가(代價)가 얼마나 큰 것인가는 100년 전 처참했던 망국의 교훈을 통해 터득한 한국인이기에 전 지구적 공동 대처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오히려 선두에 서겠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지금처럼 모든 국가의 경제사정이 나빠질수록 가장 큰 불안과 분열의 요소로 작용하는 빈부격차 문제는 선진국이나 신흥국은 물론 극빈국을 포함한 발전도상국들에서까지 안정과 성장을 짓누르는 최대 위협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각국이 직면한 계층 간 격차 못지않게 국가 간 빈부격차는 지구촌 전체의 평화와 발전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먹구름이며 언제라도 불어닥칠 수 있는 태풍과 쓰나미의 예보이고 경고일 수 있다.

  2주 후 부산에서 개막되는 ‘세계개발원조총회’에 국민의 각별한 관심이 모아져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 170여 나라에서 관계 장관을 포함한 20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한다는 행사 규모나 중요성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달 창원에서 성공적으로 열렸던 ‘세계사막화방지협약 당사국총회’도 비슷한 경우라고 하겠다. 우리 국민이 개발원조의 효율성 제고나 지구의 사막화와 황폐화를 방지하는 노력에 보다 큰 관심을 가져야 될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함께 잘 살아가자는 나눔의 윤리를 국내는 물론 지구촌에서도 행동규범으로 삼겠다는 한국인의 민족적 선택이며 둘째, 이러한 선택이 지구공동체에서의 한국의 위상을 높여줌으로써 국가이익과 국민복지에 기여하리라는 기대와 자긍심이 밑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이 해방 이후 반세기에 걸쳐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127억8000만 달러의 원조는 그 시대로서는 엄청난 규모며 우리의 산업화와 선진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결코 잊을 수 없다. 1995년 한국은 세계은행의 개발차관 대상국가에서 원조공여국으로 전환했고, 1991년 570만 달러로 시작한 해외공공개발원조(ODA)를 20년 만에 10억 달러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유엔이 설정한 기준목표나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하면 한국은 아직도 선진국 대열의 말미에 서 있을 뿐이다. 며칠 전 칸에서 열렸던 주요 20개국(G20) 회의에 초청 연사로 나온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은 수원국에서 지원국으로 발전한 한국을 국제개발원조의 모범국으로 치켜세웠지만 갈 길이 먼 우리로서는 마냥 우쭐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우리가 국제개발원조 사업에 성의껏 참여하고 있지만 분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많은 미결 과제를 갖고 있으며 또한 통일을 위해 메고 가야 할 짐이 얼마나 큰지 명심해야 한다. 그러기에 개발원조 규모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더라도 얼마 전까지 수원국의 경험을 함께했던 동지적 자세로 정말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업을 찾는 데 진솔한 마음으로 임해야 될 것이다. 우리가 비교적 성공한 나무 심기 및 자연보전운동, 열악한 환경에 처한 어린이들을 위한 백신 접종 등 드러나지 않게 효율성을 높이는 데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살기 어려운 세상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힘든 가운데서도 우리는 이른바 강대국들보다 ‘나눔의 지구촌’을 건설하는 데 앞장서 나가려 노력해 보자. 이미 이태석 신부 같은 선구자를 내놓은 민족이 아닌가.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