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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인 5명 중 1명 해외 이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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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인의 20세기는 이산과 이주의 시기였다. 격동의 세월 속에 숱한 이별과 재회가 반복됐다. KBS가 1983년 생방송으로 방영한 이산가족찾기 운동. [중앙포토]

20세기 한국인은 ‘보따리’를 진 존재였다. 일본의 침략과 지배 때문에 낯선 땅으로 징용 당하고 강제이주 당했다. 당시 해외로 이주한, 또는 흩어진 한국인이 전체의 17~20%에 이른다. 해방의 기쁨도 잠깐, 한국전쟁은 남으로 북으로 피난민을 내몰았다. 20세기 후반에 와서도 떠도는 삶은 그치지 않았다. ‘기러기 아빠’라고 표현되는 유학생 가족을 포함, 장기간의 해외 여행·취업자가 급증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인구 5명 중 1명이 국외로 이주(이산)하고, 3명 중 1명이 국내에서 이주(이산)했다.

 이주(移住)와 이산(離散)의 프리즘으로 되돌아보는 한국사는 어떤 풍경일까. 4일 서울 고려대에서 개막하는 제54회 ‘전국역사학대회’가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제안한다. ‘국경을 넘어서-이주와 이산의 역사’라는 주제 아래 일제강점기의 징용과 강제이주,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대량 난민과 이산가족 문제, 그리고 최근 급증하는 탈북자·다문화가족·외국인 이주노동자 등 다채로운 주제가 논의된다. “인간생활의 본성이 정착생활의 확대가 아니라 이주·이산에 있다는 관점에서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김경현 역사학대회장·고려대)는 인식이 담겼다.

정재정 이사장(左), 김경현 교수(右)

  ◆세계사에 유례없는 이주=첫날 기조강연에서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20세기 초 ‘동북아 이주 쓰나미’에 주목한다. 예컨대 만주 거주 한국인은 1910년 20만2000여 명이었는데, 1942년에 151만2000여 명으로 급증했다. 일본 거주 한국인도 4000여 명(1913년)에서 210만여 명(1945년)으로 폭증했다. 연해주·중앙아시아·사할린 등지로도 수만에서 수십만여 명의 한국인이 이주했다.

 한반도에는 일본인이 몰려들었다. 1945년 해방 당시 이 땅엔 일본인 9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광복과 함께 밀물과 썰물이 바뀌었다. 징용 또는 이주했던 한국인 수백만 명이 속속 귀환했다. 정 이사장은 “30여 년 간 동북아에서 벌어진 급속한 이주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고, 유럽 열강의 침략·지배와도 구별되는 현상”이라고 했다.

 ◆이주노동자 문제 시한폭탄으로=이러한 접근은 탈식민주의와 연계된 디아스포라(diaspora) 개념에서 비롯됐다. 유대인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디아스포라는 강제적으로 모국을 떠나 살면서 공동체성을 유지해가는 이주민집단 일반을 가리킨다.

 공동주제 발표에서 황혜성 한성대 교수는 이를 ‘호모 미그란스’(Homo Migrans, 이주하는 사람)로 정의한다.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가 고정된 영토 위에 성립한 뒤 국경을 넘어선 이주가 혼란을 초래하고 있지만, 세계의 지구촌화는 ‘공생의 삶’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이번 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은 김기봉 경기대 교수는 “최근 노르웨이 총기난동 사례가 보여주듯 각 사회는 이주·이민자와 더불어 사는 삶의 문제에 부딪혀 있다”며 “급속히 다문화사회로 재편 중인 한국 사회에 이주자 갈등은 시한폭탄일 수 있다”고 했다. 15개 관련 학회가 참가하는 이번 대회에선 ‘한인의 만주 이주양상과 동아시아’(신주백 연세대), ‘20세기 전반 한인의 일본 이주와 정착’(김광열 광운대), ‘분단과 전쟁의 유산, 남북 이산의 역사’(김보영 이화여대), ‘다문화 민족주의는 가능한가’(정희라 경희대) 등이 발표된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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