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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아, 너는 내 라이벌 아닌 스승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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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박영석 대장(48·오른쪽)은 엄홍길(51) 대장과 한국 산악계를 이끌었다. 10년 전 젊은 모습이다.

영석아. 하루에도 몇 번씩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네가 등반을 떠나기 전, 밤을 지새우며 술을 마신 때가 불과 두어 달 전인데…. 이제 너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오는구나. 사고 소식을 접하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너만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고, 벌써 열흘도 지났구나. 이 꿈만 같은 현실이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 너무나 당혹스럽고, 무어라 할 말이 없다. 특히 돌아가신 너의 아버지, 그리고 너의 아내를 대할 생각을 하니 앞이 막막하구나.

박영석 대장

 1989년 겨울, 너와 내가 카트만두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내가 네팔 카트만두 시내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을 때였지. 너는 그때 20대 후반의 청년이었고. 하지만 넌 벌써 랑탕리원정대장으로 후배들을 이끌고 왔었지. 만난 첫날부터 우리는 죽이 척척 잘 맞았는데 말이야. 그날 밤 어깨를 걸고 카트만두 시내를 누비고 다녔잖아. 하루 만에 그렇게 친해질 수 있었는지, 아마 산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일 거야. 그때부터 너를 후배 이상으로 생각했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망원동 너희 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아버지·어머니께 폐를 끼쳤던 생각이 나는구나. 새삼 두 분들에게 고맙구나.

 너랑은 히말라야 등반은 물론 네팔에서 함께 장사도 하고 여행사도 하고. 그러고 보니 내 30대는 너와 함께한 시절이었다. 96년 안나푸르나 등반을 마지막으로 각자의 길을 갈 때도 나는 너를 항상 응원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은 박영석과 엄홍길을 비교하기를 좋아했지. 그때마다 우리는 ‘허허’ 웃고 말았지만 말이야. 너하고 나 사이는 라이벌보다는 반면교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히말라야엔 내가 먼저 발을 내디뎠지, 너를 앞세우고 등반을 한 적도 있고. 하지만 히말라야 열네 봉우리를 넘어 남극·북극·코리안신루트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너는 나의 스승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네 모습에서 나 역시 많은 것을 배웠다.

 네 나이 올해로 마흔여덟, 내가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중단한 때와 비슷하구나.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더 강하게 너를 말렸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번 원정만 다녀오면 뒤로 물러나겠다’는 너의 말만 듣고 더 이상 붙잡지 않은 내가 너무 원망스럽다. 당뇨가 있으면서도 벽 등반에 매달리는 너를 더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나 영석아, 너의 도전 정신은 산악인 후배 는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전해질 거라 믿는다. 영석아, 나는 네가 지금도 ‘형, 큰일날 뻔했어요’하고 허허 웃으며 베이스캠프로 걸어내려올 것만 같구나. 세상 모든 것이 별것 아니라는 듯 털털하게 미소를 지으며 지금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다. 영석아, 네가 어디에 있든 너를 가슴에 간직하마.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

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現] 산악인

1960년

[現] 산악인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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