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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이니, 흐르는 단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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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계곡에는 물에도 단풍이 핀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단풍이 물이 돼 흐르고, 흐르다 지쳐 가라앉은 단풍은 물을 붉게 물들인다.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단풍인가.

단풍놀이의 백미는 계곡 단풍에 있다.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단풍 산도 좋지만, 설악산 천불동 계곡이나 흘림골, 지리산 피아골처럼 소문이 자자한 단풍 명소 중에는 유난히 계곡이 많다. 여기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물이 있으면 온도가 낮고 일교차가 심하다. 하여 단풍 때깔이 더 곱고 더 진하게 마련이다.

올가을 week&이 고심 끝에 내놓는 단풍 명소는 경북 봉화에 있는 백천계곡이다. 원래는 2005년 태백산 등산로가 뚫리면서 알려진 계곡인데, 단풍 명소로는 처음 소개하는 비경이다. 태백산(해발 1567m)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남쪽 기슭을 따라 내려오다 해발 650m 위에 있는 고원 계곡에 모여 16㎞를 흘러내리는데 이 물길이 백천계곡이다. 이 중에서 계곡을 따라 걸으며 단풍놀이를 할 수 있는 구간은 왕복 6㎞ 남짓. 쉬엄쉬엄 걸어도 서너 시간이면 충분하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 숱한 전설이 내려오는 명당

백천계곡은 오지 중의 오지다. 태백산 남쪽 기슭에 기대어 있어 태백에서도 멀고 봉화에서도 멀다. 백천계곡은 우리나라 깊숙한 곳에 박혀 있지만 막상 계곡에 들어서면 마냥 편안하다. 길지(吉地)라는 느낌이 편안한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온다.

 그래서인지 백천계곡엔 숱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예부터 전쟁이 터져도 화를 면한다는 십승지 중 하나였다는 전설도 전해오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뒤 머무를 곳으로 백담사와 백천계곡 입구 현불사를 놓고 막판까지 고민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태백산 정기를 이어받은 계곡이라 하여 얼마 전만 해도 무당이 진을 쳤고, 요즘도 선거철이면 정치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단다. 50년 넘게 백천계곡에 살고 있다는 주민 이석철(61)씨의 장황한, 그러나 확인할 길 없는 주장이다.

 아무튼 백천계곡의 주인은 따로 있다. 특별보호어종이자 천연기념물인 열목어다. 열목어는 빙하시대에 살던 어족으로 한여름에도 20도 이하 수온에서만 살 수 있다. 물도 유난히 깨끗해야 한다. 산소함량이 10ppm 이상인 물에서만 살 수 있는 까다로운 녀석이다. 이 열목어가 백천계곡에서 알을 낳는다. 보통 어른 손으로 한 뼘 크기지만, 주민 이씨에 따르면 백천계곡에서는 50㎝가 넘는 큰놈도 흔하단다. 열목어 덕분에 백천계곡은 계곡 전체가 천연기념물이 됐다. 계곡에 발만 담가도 처벌된다. 백천계곡이 훼손되지 않고 여태 극상림의 형질을 보존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 원시림의 계곡에 단풍이 물드는 것이다.

(사진左)백천계곡은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원시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사진右) 백천계곡 오솔길에 단풍이 소복하게 쌓였다. 인적이 드물어 길 위의 단풍이 좀처럼 다치지 않았다. 백천계곡을 걸으려면 발 아래를 조심해야 한다.

# 하늘도 나무도 땅도 물도 온통 붉더라

백천계곡 상류에 가면 아름드리 금강송 군락이 형성돼 있다. 이 금강송을 탐낸 일제가 계곡을 따라 산판길을 냈는데, 그 길이 지금은 한갓지고 그윽한 오솔길이 되었다. 백천계곡 단풍 트레킹은 그 길을 걷는다.

  백천계곡 단풍 트레킹은 현불사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주차장에서 20분쯤 걸어서 올라가다 보면 텃밭을 끼고 있는 농가가 띄엄띄엄 보인다. 모두 다섯 채. 백천계곡에 기대어 사는 세대수의 전부다. 이 중에 이석철씨의 집도 있다. 농가가 끝나는 지점에 바리케이드가 길을 가로막는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자동차도 거의 없는데, 굳이 바리케이드까지 친 이유를 생각한다. 이 너머부터는 열목어 세상이라는 뜻일 터다.

 바리케이드 너머부터 길이 달라진다. 부드러운 흙길이다. 흙길에 단풍이 쌓여 울긋불긋하고 폭신폭신하다. 여느 단풍 계곡과 달리 인적이 드물어 길에 떨어진 단풍이 다치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 있다. 그랬다. 지난주 백천계곡은 이미 붉었다. 이씨는 “요 며칠 춥더니 확 들어 버렸다”면서도 “그래도 다음 달 중순까지는 단풍잎이 깔려 있어 정취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하늘을 가린 키 큰 나무가 붉고 단풍이 깔린 길이 붉어 시야가 온통 붉다. 계곡에 내려가니 물도 붉다. 계곡에 떨어진 단풍이 계곡 굽이마다 쌓이고 쟁여져 붉은 물이 흐른다. 휴대전화 신호도 진작에 끊겼고 계곡에는 오가는 이 하나 없어 가을바람에 단풍잎 떨어지는 소리만 도드라진다.

 백천계곡에 들면 단풍은 꽃이 된다. 나무에서 피고 길에서 피고 물에서 핀다. 아니 백천계곡 단풍은 꽃이 되어 진다. 길이 되어 쌓이고 물이 되어 흐른다. 정말 오랜만에, 단풍에 진탕 취해봤다.

●여행정보 백천계곡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영월∼정선∼태백을 거쳐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나와 36번 국도와 35번 국도를 차례로 타고 가는 길이다. 시간은 얼추 비슷하게 걸린다. 내비게이션에서 현불사나 모리가든(054-672-6446)을 찾으면 백천계곡 입구까지 갈 수 있다. 백천계곡에서 태백산 천제단을 오르는 등산로는 산불조심기간이 시작되는 11월부터 출입이 통제된다. 영주국유림관리소(054-630-4010). 걷기여행 전문 승우여행사(www.swtour.co.kr)가 이달 30일, 11월 5·6·12·13·19일 당일 여정으로 백천계곡 단풍 트레킹을 다녀온다. 4만5000원. 02-720-8311. 

서울 근교 당일치기 단풍놀이 명소

단풍을 보기 위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서울 주변에도 단풍 구경할 곳은 널려 있다. 먼길 떠나 고생하다 보면 짜증 길이 되는 것이 단풍놀이인데, 반나절이면 실컷 감상하고 돌아올 수 있으니 어찌 보면 더 현명한 선택일지 모른다. 이석희 기자

# 북한산 우이령 : 전망 데크에서 바라보는 오봉 단풍

코스 중간중간 곱게 물든 단풍도 아름답지만 우이령 정상부에서 바라보는 오봉 능선의 단풍이 최고란다.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약 2㎞ 올라가면 오봉 전망데크가 나온다. 여기서 오봉 쪽을 보면 기기묘묘하게 생긴 큰 바위와 단풍이 어우러져 비경을 이룬다. 다만 이 경치를 만끽하려면 반드시 하루 전까지 예약해야 한다. 하루 1000명 선착순이다. 031-855-6559(교현탐방지원센터).

# 남이섬 : 섬 전체를 뒤덮은 단풍

‘나미나라’를 관통하는 은행나무 잎은 지난주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타세쿼이아길 인근 별장 지대에는 단풍이 이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남이섬 단풍은 물안개와 어우러졌을 때 더 곱다. 여유가 있다면 별장에서 하룻밤 묵을 것을 권한다. 아니면 아침 7시30분 첫 배를 타고 들어가서 호젓하게 구경하는 것도 괜찮다. 입장료 1만원(일반).

서울대공원

# 서울대공원 : 놀면서 즐기는 단풍

4㎞에 이르는 서울랜드 외곽 순환길은 차를 타고 단풍 구경하기에 좋은 코스다. 찬찬히 가을의 정취를 느끼려면 국립 현대미술관 주변 길을 거닐면 된다. 노란색 은행나무와 붉은색 단풍이 어우러져 있어 연인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다음 달 초순께 이 길을 따라 걷다 청계산을 올려다보면 만산홍엽의 의미를 알 수 있다.

# 에버랜드 : 호암 호수에 비친 단풍 그림자

가을에는 단풍 명소로 더 유명하다. 은행나무·단풍나무 등 10여 종, 수천 그루의 나무가 빨간·노란 색깔 경연을 펼친다. 특히 호암 호수에 비친 단풍은 더없이 아름답다. 데칼코마니 마냥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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