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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길에 배운 바느질,학문 영역으로 끌어올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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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호 02면

1 19세기 중국의 화문여포(花紋女袍). 만주족 여성들의 의례복이다. 197.2*140.7㎝

60년대에 일본 진출, 세계 누비며 ‘한국 바느질’ 알려
전쟁은 누군가에겐 기회였다. 소녀가 바느질을 익힌 것은 피란길에서였다. 러시아계 한인 선생님은 그에게 자수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목화 따는 것도, 명주실 잣는 것도, 천연 염색하는 방법도, 그때 다 배우고 익혔다.

바늘로 수를 놓는데 점점 재미와 자신이 생긴 그는 아예 자수 학원을 냈다. 그게 1965년이었다. 학생들이 만든 자수 제품을 팔기 위해 ‘설원 동우회’라는 단체도 만들었다. 설원(雪園)이라는 호는 철기 이범석 장군이 지어주었다. “말 안장에 수를 놓아달라는 부탁을 들어드렸더니 ‘눈처럼 깨끗하게 살라’며 직접 써주시더라고요.”

2 자수가 들어있는 청동거울. 중국 전국시대 것이다. 지름 11.2㎝.3 중국 청나라의 예식용 갑옷. 201*153 ㎝.

워커힐의 조그만 갤러리에서 자수 제품을 팔던 67년, 그에게 문득 기회가 왔다. 일본 수공예문화협회로부터 도쿄 전시를 제안받았던 것.
“제 전시를 본 장애인 단체에서 자수 키트를 만들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전시회 수익금을 기금으로 쓰라고 다 기부했죠. 그랬더니 일본 언론에서 난리가 났어요. 유명 인사들이 연일 찾아오고. 요즘 말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거지.”

귀국하니 청와대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통일’에 대한 희망을 담아 10폭짜리 잉어 병풍을 만들어 보냈다. 한반도 모양의 무궁화 병풍도 만들었다. 육영수 여사는 “가장 아름다운 요람을 만들어 보라”며 여성회관에 강좌를 마련해 주었다.
방송사는 그의 자수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젊고 예쁜 처자는 ‘리포터’가 되어 방송 출연도 시작했다. “배우를 해보라”는 제의까지 있었다.
하지만 ‘충청도 또순이’의 관심은 자수였다. 가장 흥미로웠던 제안은 KOTRA(대한무역진흥공사)로부터 나왔다.

4 정영양 박사가 만든 자수 병풍 ‘통일’ 앞에서 독일 대사 내외와 환담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 이상 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 제공

“세계에 나가 한국 자수를 알리라는 것이었어요. 자수 제품을 이고 지고 해외 박람회를 찾아다녔죠. 이란에 가서는 전통 페르시아 자수 제품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고, 당시 공산국가이던 이집트를 찾아가서는 그들의 전통 문양에 감동받기도 했어요. 공부할 게 참 많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더라고요. 그때 미국 전시가 잡혔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갔죠.”

명나라 옷 뜯어보며 연구 ... 한·중·일 자수 연구로 박사
“박물관에 있는 텍스타일을 정리해야 하는데 네가 날 좀 도와줄래?”
뉴욕대 미술교육과 석사 과정에 다니던 그에게 뉴욕 메트로폴리탄 텍스타일 뮤지엄 진 메일리 박사의 요청은 새로운 기회였다. ‘메트’의 스터디룸은 그의 연구실이 됐다.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직접 다 만져보고 뜯어봐야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박물관 소장품을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때부터 수집을 시작했죠. 밥을 굶어가며 산 명나라 의상을 다 뜯어 분해하니 친구들이 모두 ‘미쳤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가격으로는 수만 달러짜리들인데.”
그가 이 무렵 구입해 후일 숙명여대정영양자수박물관에 기증한 물건 중 하나가 중국 전국시대(BC 475~221)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거울이다. 뒷면에 견사자수가 있는, 희귀한 것이다.

한·중·일 3국의 고대 의상과 자수 발달사를 꼼꼼히 비교한 그의 76년 뉴욕대 박사 학위 논문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자수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은 뉴욕대에서 처음이었다. 아녀자들의 취미생활 정도로 여겨졌던 자수가 정식 ‘학문’으로 대접받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이 논문을 보완해 79년 출간한 『The Art of Oriental Embroidery』는 81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의해 ‘올해의 미술서적’에 선정됐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다. 2003년에는 『Painting with needle:learning the Art of Silk embroidery with young yang Jung』을, 2005년에는 『Silken Threads』를 발간했다.

“그전에도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잇따랐는데, 일단 책이 나오니 편하더라고요. 한국이라는 이름조차 모르던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 섬유공예와 자수에 대한 강의를 함으로써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고 자부합니다. 특히 말이나 사진보다 자수 실물을 보여주면 그렇게 감탄할 수가 없더라고요. 80년 초기에 뉴어크(Newark) 뮤지엄 NYC 큐레이터가 자수로 된 활옷을 보고 너무 좋아하기에 잘 전시해달라고 제 한복 몇 점과 함께 기증했죠. 또 보스턴의 피바디 에섹스 뮤지엄, 워싱턴 텍스타일 뮤지엄에도 기증을 했습니다. 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을 찾아오시면 어떤 ‘보물’이 있는지 바로 확인하실 수 있어요. 하하.”

2004년 개관한 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은 섬유 공예와 자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숨겨진 성지’ 같은 곳이다. 이곳을 찾으면 조선의 전통 활옷, 중국 황제가 기우제를 지낼 때 입은 옷, 일본 황실의 기모노, 몽골의 전통 의상 등 섬세한 자수 문양이 담긴 아시아 각국의 전통 의상을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다.

11월 ‘코리안 아이’전서 한국 자수 명인 초청해 시연
전 세계에 불고 있는 한류 붐은 그에게도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K-POP을 전 세계 젊은이들이 따라 하고, 한식을 통해 한국의 맛을 재발견하기 시작한 이때, 앞으로는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전통, 그리고 철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제는 우리가 전통에서 맥을 찾고 이를 가장 현대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할 때입니다. 21세기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죠. 이를 위해 수공예의 부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설원파운데이션을 통해 하려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미국의 주요 인사들이 그의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마이클 잭슨의 키보디스트였고 작곡가이자 현대미술 작가로 유명한 제이슨 마츠(Jasun Martz)는 정 박사의 이름을 딴 ‘Young’이라는 교향곡을 작곡해 국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헌정앨범을 만들었다. 또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재단에 기증하겠다고도 약속했다.

아시아 소사이어티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최우람 작가의 전시(9월 9일~12월 31일)는 그가 처음 후원한 행사다. 11월 1일부터 내년 2월 28일까지 아트앤 디자인 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 현대미술전 ‘코리안 아이’ 후원 요청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특히 한국 자수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그는 이 행사에 김태자 자수 명인을 초청했다. 전시장에서 시연도 하며 화제를 만들어낼 생각이다.

“한 나라의 문화는 수공예품에서 나옵니다. 한국 자수는 한국 수공예의 절정이지요. 한국을 오래전에 떠난 저는 그동안 우리 자수가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것을 세계 곳곳에서 보아왔는데, 그 뿌리인 고국에서의 자수인들은 여전히 반세기 전 바느질쟁이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그는 국내에서도 자수 문화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 내년 4월 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에서 대대적으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영어판으로 나왔던 책들을 한글판으로 출간하기 위한 작업도 착수했다.

“일을 시작하니까 마음 깊은 곳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어요. 힘 닿는 데까지 자수 알리는 일을 할 겁니다. 제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더 좋고요.”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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