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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의 세상읽기] 외나무 다리에 선 한국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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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다리가 보인다. 하나는 철골 구조물로 만든 왕복 10차선 트러스 교량이고, 다른 하나는 널빤지를 엮어 만든 외나무 흔들다리다. 웬만한 강풍에 철교는 꿈쩍도 않지만 외나무 다리는 미풍에도 출렁거린다. 넓고 튼튼한 철교에서는 떠들고 싸워도 추락할 염려가 별로 없지만 외나무 다리에서는 조금만 방심해도 천 길 낭떠러지 행(行)이다.

 “미국이 10차선 철교 위에 있는 나라라면 한국은 외나무 흔들다리에 있는 나라다.” 불쾌하고 과장된 비유다. 그러나 ‘21세기 마키아벨리’의 냉정한 눈에는 그렇게 비치는 모양이다. 지난주 서울에서 존 미어샤이머(시카고대·국제정치학) 교수를 만났다(본지 10일자 14면). 신(新)현실주의 국제관계 이론의 대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세계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나라로 한국과 폴란드를 꼽았다.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그에 따르면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 두 개의 대양(大洋)이 확실한 방호막 역할을 해주고 있고, 주변에 안보를 위협할 지역 패권국이 없다. 멕시코나 캐나다가 미국과 전쟁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 W 부시 행정부처럼 대외정책에서 실수를 해도 국가의 안위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충격을 흡수하고,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폴란드의 처지는 미국과 다르다고 그는 주장한다. 한 발짝만 삐끗해도 바로 절벽 아래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수를 용납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작다는 얘기다. 따라서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를 배격하고, 철저히 현실주의에 입각한 전략적 시각으로 국제 관계를 바라봐야 한다는 충고다. 실제로 두 나라는 대외정책의 실수 탓에 지도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18세기 이후 폴란드 역사는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 간 분할과 통합의 역사였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중국과 북방, 일본이 각축하는 패권 다툼의 무대였고, 20세기에는 식민지를 경험했다.

 중국의 평화로운 부상을 뜻하는 ‘화평굴기(和平<5D1B>起)’는 희망적 사고에 불과하다는 데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가들의 견해는 일치한다. 중국의 대표적 현실주의 이론가인 옌시퉁(閻學通) 칭화대 교수는 “빛을 감추고 조용히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는 고립주의자들의 변에 지나지 않는다”며 “중국의 화평굴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미어샤이머 교수도 같은 견해다. 경제력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군사력의 강화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지역 패권의 추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태 지역에서 우월적 지위가 위협받는 것을 원치 않는 미국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미·중 갈등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그들의 시각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4박6일의 워싱턴 국빈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의 방미에 맞춰 미 의회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절차를 완료함으로써 한·미동맹이 다원적 전략동맹으로 발전하는 전기가 마련됐다고 나팔을 불고 있다. 군사·안보뿐만 아니라 경제까지 포괄하는 다층적 동맹관계로 진화하게 됐다는 것이다. 청와대 설명대로라면 이 대통령의 이번 방미는 취임 이후 그가 추구해온 대미(對美) 편향 외교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한국은 미국에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 됐다”고 말한다. 냉전 시절 대소(對蘇) 견제의 최전선에서 독일이 지녔던 전략적 가치를 지금은 대중(對中) 견제에서 한국이 갖게 됐다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이 대통령에 대한 극진한 환대는 미국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하다는 얘기다.

 이명박 정부의 대미 편향 외교에 대해 중국은 노골적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2008년 5월 중국을 방문한 이 대통령이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회담하기 직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미동맹은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했다. 손님 불러놓고 뺨 때린 격이다. 돈은 중국에서 벌면서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는 한국의 이중적 행태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감추지 않고 있다.

 앞으로 중국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경우 중국은 한·미동맹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때도 말로만 불만을 표시하고 넘어갈 것인가. 미·중 사이에서 한국에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이 오는 것은 아닌가.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를 빌미로 중국이 외나무 다리를 마구 흔들어대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는가.

 결론은 자명하다. 한·미동맹을 강화하더라도 공연히 중국을 자극해선 안 된다. 쓸데없이 나팔을 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 대통령이 미 언론과의 회견에서 중국 위협론과 대중 견제론으로 비칠 수 있는 말을 한 것은 경솔했다. 우리가 처한 위태로운 처지를 생각한다면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베이징의 행보가 주목된다. 화려한 파티 뒤에는 숙취가 남는 법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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