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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명예의 전당 (3) - 행크 애런

중앙일보

입력

기네스북에서 행크 애런의 이름을 볼 수 있는 부문을 찾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메이저 리그 통산 최다 홈런 부문만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애런은 개인으로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우편물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 대다수는 그가 베이브 루스의 통산 홈런 기록을 깨뜨린 시기를 전후해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증오의 메시지를 담아 보낸 편지들이었다. 이렇듯 그는 최상의 영예와 최악의 모욕을 동시에 경험한 보기 드문 인물이다.

애런에게는 베이브 루스에게서 볼 수 있었던 화려한 면모는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시즌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바가 없었으며, 언론의 주목을 크게 끌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매년 슬럼프 없이 꾸준한 활약을 보였고, 그러했기 때문에 역대 선수 중 통산 홈런·타점·장타 수·누타수(Total Bases) 등에서 1위, 안타 수 3위에 오르는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다.

애런은 10대 시절 흑인들만이 속한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의 팀 중 하나인 인디애나폴리스 클론스에서 유격수로 활약하였다. 당시는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 리그의 인종 장벽을 '형식적으로는' 무너뜨린 뒤였으나, 실제로는 흑인 선수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런은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그는 당시 보스턴에 연고지를 두고 있던 브레이브스의 눈에 띄어 1952년 5월 7500달러에 입단 계약을 맺었으며, 마이너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브레이브스가 밀워키로 옮겨와 맞은 두 번째 시즌인 1954년, 스프링 캠프에서 바비 톰슨이 다리 부상을 당했고 브레이브스는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애런을 빅 리그로 불러 좌익수로 기용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20세였다.

애런은 발목 부상으로 루키 시즌을 완전히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0.280의 타율과 13홈런을 기록하였고 이듬해부터 주전 우익수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급격한 성장세를 보인 그는 1956년 처음으로 리그 타격왕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7년 그는 당대 NL최고의 슬러거 중 하나였던 3루수 에디 머튜스와 함께 공포의 홈런 듀오를 구축하였다.

이 해에 애런은 44홈런과 132타점을 올려 이 두 부문에서 리그 수위에 올랐으며, 타율 3위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그는 이 해에 NL MVP가 되었다.

또한 이 해에 브레이브스는 보스턴에 연고지를 두고 있던 시절인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리그 챔피언에 올랐고, 애런은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한 월드 시리즈에서 0.393의 타율과 3홈런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활약에 힘입어 브레이브스는 밀워키 팬들에게 감격의 첫 우승을 선사할 수 있었다.

다음 해인 1958년 애런은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기는 했으나 홈런 5위, 타점 6위에 그쳐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월드 시리즈에서 다시 양키스와 격돌한 브레이브스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1959년 애런은 두 번째로 타격왕에 올랐고, 장타율 수위와 골든 글러브도 함께 차지하여 자신의 진가를 다시 입증하였다.

1960년 그는 2년 동안 시카고 커브스의 어니 뱅크스에게 내 주었던 NL 홈런 타이틀을 다시 거머쥐는 동시에 골든 글러브를 3년 연속으로 차지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는 홈런-타점-타율 3개부문 수위, 이른바 '트리플 크라운'에 도전하였으나, 1957년과 마찬가지로 홈런과 타점에서만 수위에 올랐고 타율 부문에서는 3위에 그쳤다.

1965년 시즌을 끝으로 브레이브스는 밀워키를 떠나 애틀랜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애런은 팀이 옮겨와 맞은 첫 해인 1966년에 다시 NL에서 홈런과 타점 1위를 차지했으며, 이듬해에도 홈런왕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의 활약으로 인해 처음으로 메이저 리그 팀의 프랜차이즈가 된 애틀랜타에는 야구 열기가 고조되었다.

1969년 처음으로 양대 리그가 동-서 2개의 지구로 나뉘어졌고, 44홈런을 친 애런의 활약에 힘입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NL 서부 지구의 첫 우승팀이 되었다.

그러나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브레이브스는 애런이 매 경기마다 홈런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해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뉴욕 메츠에 3전 전패를 당해 탈락했다. 이것이 애런의 마지막 포스트 시즌이었다.

계속 꾸준한 활약을 보이던 애런은 1972년 34홈런을 기록하여, 통산 홈런 수를 673개로 늘려 윌리 메이즈(660개)를 누르고 역대 선수 중 이 부문 2위에 올랐다. 이어 1973년에 3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40홈런을 기록하였으며, 베이브 루스의 기록에 한 개 차이로 접근하였다.

루스의 기록이 깨지는 것은 기정 사실이 되었고, 이에 루스의 기록이 영원히 전설로 남기를 바랐던 일부 백인들은 분노를 금하지 못했다. 그러나 애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1974년 시즌을 앞두고, 브레이브스는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치르는 원정 개막3연전에 애런을 출전시키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는 애런이 애틀랜타의 홈 팬들 앞에서 축하를 받으며 기록을 경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커미셔너 보위 쿤은 애런을 출전시킬 것을 요구했고, 에런은 첫 경기에서 잭 빌링엄 투수로부터 홈런을 뽑아내 루스의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이 홈런은 리버 프론트 스타디움에서 기록된 첫 정규 시즌 홈런이기도 했다.

애런은 신시내티 3연전 중 나머지 두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고, 이어 브레이브스는 LA 다저스를 상대로 3연전을 치르기 위해 홈으로 왔다.

애런은 4월 8일 경기에서 4회 말에 다저스의 선발 투수인 앨 다우닝의 2구를 통타, 좌측 펜스를 넘기는 투런 홈런을 날렸다. 그가 영원히 깨지지 않으리라던 루스의 기록을 갈아치우는 715호 홈런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애런은 1974년 시즌을 마친 뒤, 밀워키 브루어스로 이적하여 자신이 선수 생활의 전반기를 보낸 밀워키 카운티 스타디움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브레이브스에서 기록한 733홈런에 22개를 추가한 뒤, 1976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그는 1982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으며, 이후 브레이브스의 프런트 업무를 맡고 있다.

헨리 루이스 애런(Henry Louis Aaron)

- 1934년 2월 5일 앨라배마 주 모빌 출생
- 우투우타
- 1954년~1974년 밀워키-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외야수
  1975년~1976년 밀워키 브루어스 지명타자
- 통산 타율 .305 3771안타 755홈런 2297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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