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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현미의 아티스트 인 차이나 (10) 중국 산수화의 대가 쉬룽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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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쉬룽썬(徐龍森·Xulongsen·55)을 만나러 가는 길, 마침 중국 최고의 문인화가라 일컫는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의 수묵화 한 점이 2011 춘계 자더경매회에서 718억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의 다른 그림이 202억원으로 최고가를 경신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중국 현대미술에 쏠렸던 관심이 바야흐로 중국 전통화로 회귀했음을 만천하에 알린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중국 산수화가 쉬룽썬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전통미학의 현대화에 힘쓰고 있는 중국 산수화가 쉬룽썬의 아틀리에는 베이징 동풍예술구의 첫 번째 집, 1호원이다. 작가가 직접 디자인한 아틀리에는 그의 산수화처럼 첩첩산중 심산유곡이다. 대문 안 마당을 가로질러 중문을 열고 들어서야 비로소 중정 같은 연못을 가운데 둔 주거 공간을 만나게 된다. 이 공간은 1층과 2층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사각 모양의 회랑식 건물인데, 이 건물 뒤쪽으로는 벽오동 나무를 한 아름 안고 있는 뒤뜰이 있다.

뒤뜰 너머엔 웬만한 대학 체육관도 울고 갈 또 하나의 대형 작업실이 있다(천장 높이가 11m라 초대형 사이즈의 대작은 이곳에서 기중기식 컨테이너로 이동하며 작업한다). 아틀리에 규모가 하도 커서 공간 안에 또 다른 어떤 공간들을 품고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첩첩 공간이다. 게다가 현관 입구부터 구석구석 ‘옛 물건들’이 가득해 아틀리에는 마치 박물관과도 같다. 가구와 그림은 물론 문을 지키는 석상도, 마당 벤치로 사용 중인 상석과 실내를 가르는 문짝도 모두 청·명·송을 아우르는 고미술품들이다. 박물관과 다른 게 있다면, 감각 넘치는 고미술품들이 탁월한 안목으로 쓰임새 있게 배치돼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라고 해야 작가와 일하는 사람 두셋이 고작인데 공간이 너무 큰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작가의 대답. “깨어있을 때 작업하고, 작업하지 않을 때는 잠을 자는 그야말로 창작에 천착하는 내게 이곳은 나의 지친 몸과 마음을 지탱해주는 곳이다.” 세상과 교유할 일 없으니 밖에 나갈 일도 없다는 작가는 과거의 물건들이 숨 쉬고 있는 현대의 공간에서 창작의 에너지를 충전한다고 했다. 그가 24시간을 보내는 아틀리에는 작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뮤즈나 다름없었다.

작가는 인터뷰 내내 두 종류의 마르텔을 믹싱한 코냑을 조금씩 홀짝였다. 작업하는 중에도 알코올이 있어야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고 털어놓았다. 깨어있는 시간엔 작업을 한다 했으니, 늘 술과 작업이 함께한다는 얘기다. 살짝 취기가 돌고 있는 물아 경지에서의 작품 몰입이라-.
“전업 작가들은 술을 마시며 작업하지 않아요. 일과 삶이 분리돼 있죠. 쉬룽썬 작가는 심오한 전통 예술과 일이 합일돼 이른바 삶과 일이 합일의 경지에 이른 거예요. 아틀리에 공간 역시 일과 생활이 공존하고 있잖아요.”

쉬룽썬 작가의 작품 속 산수는 현실에서 경험한 산수가 마음을 통해 시각적으로 재생돼 나온 심상의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예술보다 정신 세계를 추구한다. 그러니 “좋은 산수를 그리려면 풍류적 삶을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게 아트미아 갤러리 진현미 대표의 설명이다. 세상과 교유하지 않는 작가에게 고미술품 가득한 너른 아틀리에는 작가적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것은 작품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또 다른 물아일체의 상태. 작가 역시 스스로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상적인 궤도에서 외부 유혹으로 궤도를 벗어나는 일 없는, 확신에 찬 삶을 살고 있다.”

“중국 산수화는 중국 문화의 정수다. 여기서 출발해 여기서 나오는 자만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쉬룽썬 작가의 작가적 삶에 대한 프라이드는 넓디 넓은 아틀리에만큼 높고도 높았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르자 작가는 회랑식 건물 안에 있는 작업실에서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 한 가지 독특한 건 좌식이 아닌 서양화처럼 입식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철판을 대고 그 위에 폭신한 부직포를 감싸 마감한 벽에 자석으로 화선지를 고정해 놓고 서서 그림을 그린다. 바닥에서 그리면 작품 전체를 보면서 그릴 수가 없어 고안한 방법이라고. 한 획, 한 획 붓을 놀리며 그림을 그리는 뒷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중국의 한 평론가는 이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작가는 병력을 배치하듯 한 필, 한 먹 진을 치듯 그림을 그린다. 그에게 종이는 싸움터이고 붓은 칼이며, 먹은 방패, 물은 해자다. 풍경 속 폭포를, 정자를, 사람을 모두 배제하니, 비로소 세상의 원기를 안고 있는 산수가 되었다.”

중국 전통화에는 고대부터 그림을 그리는 데 여러 가지 준법이 있다. 쉬룽썬 작가는 이러한 기법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라 생각해 전통을 배제하고 자연과의 직접 접촉을 시도했다고 한다. 게다가 중국 전통 산수화에는 개인적 정서만이 담겨 있다. 그림 위에 도장을 찍고 글을 입히니 산수는 배경으로 퇴락하고 만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배경이 되어버린 산수를 주체사상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하늘의 뜻을 품을 수 있는 더 높은 산으로 올라야 했다. 그리하여 작가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해 나의 눈으로 산수를 보고 표현기법을 찾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정자, 시냇물, 폭포, 사람 등의 구체적 요소를 모두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런 요소들이 우리를 현실로 끌어들이는데, 이 모든 것을 배제하고 나니 정신적 세계만이 남게 되었다. 세상의 원기를 안고 있는 산수가 된 것이다.

“그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세요. 디테일은 마치 어린아이의 것 같지 않나요? 한 획, 한 획은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 어설퍼 보여요. 쉬룽썬은 전체를 위해 디테일을 숨겼어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란 듯 말이죠. 전통의 기법들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기법으로 중국 산수화의 기개를 끄집어냈어요. 재현하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흔적과 자취를 창조했죠. 한 필, 한 필 진을 치듯 한 붓질은 고등 수학처럼 황금 비율로 화합해 한 폭의 산수로 완성된답니다.”

진현미 대표의 설명을 듣고 대형 작업실에 걸려있는 대작 ‘도법자연(道法自然·2590*347㎝)’(2002~2008)과 ‘고산앙지’(高山仰止·1030*848㎝) 앞에 서니, 마치 운무가 장관인 심산유곡 안으로 깊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완성하는 데만 7년이 걸렸다는 이 작품 안에는 중국 산수화의 모든 이해와 기법, 작가 자신만의 현대적 기법이 총망라돼 있다고 했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한탄하던 중국 전통 산수화에 아직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작가 쉬룽썬. 전통 미학을 현 시대의 예술로 평가받게 한 작가의 창조력은 유럽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6월 말부터 유럽 순회전이 시작됐는데, 중국 산수화로는 유럽에서의 첫 전시라고 했다. 6월 21일 로마 고대문명박물관에 이어 10월에는 영국 런던대학미술관에서, 내년 3월에는 프랑스 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작가 쉬룽썬의 일련의 사고가 보이는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그의 홈페이지(www.xulongsen.com)를 추천한다. 연도별, 주제별로 정리돼 있을 뿐 아니라 대작들의 장엄한 지난 전시 사진도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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