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학자 황현(1855~1910) 초상 부분. 채용신 작, 비단에 채색, 보물 1494호, 개인소장. 황현은 명재상 황희(1363~1452)의 후손. 매천야록을 써 이름을 알렸다. 장원 급제했으나 시국이 혼란해 은거하다 일제에 국권을 뺏기자 절명시(絶命詩)를 짓고 음독 자결했다. 이 초상은 조선 말 최고의 초상화가 석지(石芝) 채용신이 황현이 세상을 뜬 직후인 1911년 생전 사진을 보고 그렸다.
고려 불화의 정교한 세필(細筆)을 이어받았을까. 조선의 화가들은 “터럭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정신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극사실주의에 충실한 몇 백 년 전 초상화로부터 그 인물이 앓았던 질병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다. 거기에다 그 인물의 성정(性情)까지 담긴 걸작 초상화가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27일부터 11월 6일까지 기획특별전 ‘초상화의 비밀’을 연다. 태조 어진(御眞)부터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가 그린 조선인 드로잉까지, 총 200여 점이 출품돼 초상화전으론 최대 규모에 달한다.
◆태조 어진 열흘간 공개=온전히 전하는 어진은 태조 어진, 영조 어진, 고종 어진 등이 각 한 점씩이고, 나머지는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연잉군 초상, 철종 어진, 익종 어진은 불 탄 잔편(殘片)만 존재한다.
그 중 최고봉으로 꼽히는 게 태조 어진(보물 931호)이다. 1872년 모사돼 전북 전주시 경기전에 봉안된 것이다. 조선시대 제작된 어진 28개 본 중 원본이 남아있는 건 없다.
문동수 학예연구사는 “이모본(移模本)을 만들면서 기존의 낡은 어진은 물로 씻어 땅에 묻는 ‘세초(洗草)’ 의식을 치렀다”고 설명했다. 전시에는 현전하는 어진이 거의 다 모였다. 단, 태조 어진은 열흘간 원본이 전시되고 이후 모사본으로 교체된다. 중국 청나라 강희제 때 섭정을 펼친 무관 오보이(1615~1669) 초상, 1874년에 그린 일본 사가 천황(786~842) 초상도 나란히 전시됐다.
◆공신에게 내린 초상화=조선왕실은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의 초상화를 그려줬다. 두 벌을 제작해 한 벌은 조정에서 소장하고 한 벌은 종손가에게 내려 봉안토록 했다. 인물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명기가 그린 채제공 초상(보물 1477호), 1774년 무과 승진시험 합격자들의 초상첩, 정조가 아낀 신하들을 모아놓은 초상첩 등이 눈길을 끈다.
우정으로 친구를 그려주기도 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가 친구 심득경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추모하며 그린 초상(1710년작, 보물 1488호)은 문인화가가 그린 초상의 명작으로 꼽힌다. 이 그림을 심득경의 집에 보내 벽에 걸었더니 마치 죽은 이가 되살아 온 것 같다며 온 집안이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 청나라 대신 오보이(1615~69) 초상(왼쪽). 18세기 중반~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세로 193.7㎝, 가로 125㎝, 스미소니언 프리어새클러갤러리 소장. 오른쪽은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 초상. 일본 에도 초기, 비단에 채색, 세로 82.9㎝, 가로 41.3㎝, 교토대박물관 소장.
◆핏줄은 닮은 꼴=이번 전시에선 교토대(京都大)박물관에 소장된 이봉상(1676~1728) 초상이 처음 공개된다. 이봉상은 이순신(1545~98) 장군의 5대손이다. 1953년에 제작된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과 나란히 놓인 이봉상 초상은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문동수 학예연구사는 “이봉상의 초상은 기골이 장대하고 용감무쌍한 무인의 분위기가 살아있으나 이순신 표준영정에선 무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전시에선 부부, 부자, 조손 등 가족의 초상을 나란히 비교해놨다. 조손 관계였던 문신 이재(1680~1746)와 이채(1745~1820) 초상 등에서 핏줄은 역시 닮은꼴임을 확인할 수 있다. 관람료 5000원(성인). 02-2077-9265.
이경희 기자
◆세초(洗草)=글자나 그림을 물에 씻어 지우는 것을 뜻한다. 역대 왕의 실록(實錄)을 편찬한 뒤 초고(草稿)를 없애는 것도 세초라 한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라 물에 씻어 글자를 지운 뒤 제지 원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어진의 경우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고종 9년(1872) 태조 어진을 이모한 뒤 낡은 어진을 불에 태워 백자항아리에 담아 경기전 북편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