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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기수 천비란, 청년 혁명가들을 사로잡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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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라고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중국인들은 먹는 것과 남녀관계를 가장 중요시해 왔다. 특히 남녀 문제로 인해 친구와 형제, 심한 경우 부자간에도 피를 뿌린 일이 수천 년간 비일비재했다.

모스크바 동방대학 시절의 뤄이눙(왼쪽 둘째).공청(共靑)의 설립자 런비스(任弼時·왼쪽 첫째). 꼬마 마르크스 류런징(劉仁靜·오른쪽 둘째), 후일 마오쩌둥과 한바탕 당권경쟁을 벌인 장궈다오(張國燾·오른쪽 셋째)와 함께 사진을 한 장 남겼다. [김명호 제공]

1924년 중국인 여학생 3명이 동방대학(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주의대학의 약칭)에 입학했다. 두 명은 프랑스에서 건너온 근공검학 출신, 다른 한 명은 후베이(湖北)성 학생운동 영수였던 천비란(陳碧蘭·진벽란)이었다. 천비란은 그중 나이가 가장 어렸다. 언변이 뛰어나고 생긴 것도 제일 예뻤다.
천비란은 5·4운동 지도자이며 광시(廣西)성 최초의 중공당원이었던 황르쿠이(黃日葵·황일규)의 애인이었다. 중국을 떠날 때 절교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남학생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뤄이눙(羅亦農·나역농)이 끼어들자 다들 잠잠해졌다.

뤄이눙은 중공의 모스크바지부 최고지도자였다. 펑수즈(彭述之·팽술지)도 있었지만 뤄이눙이 제1 바이올린이라면 펑수즈는 제2 바이올린 격이었다.

천비란은 뤄이눙과 동거에 들어갔다. “나이도 어린 게 사람보다 지위에 혹했다”며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펑수즈와 천비란은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천비란의 젊은 시절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귀국 일이 다가오자 천비란은 뤄이눙에게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뤄이눙은 중앙당교(中央黨校)의 전신인 베이징 당교 설립을 위해 한동안 천비란과 떨어져 있었다. 천비란은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에서 지하공작을 펼치며 뤄이눙을 요리조리 피했다. 뤄이눙이 혈서를 써서 보내자 마지못해 반응을 보였다.

1925년 가을 중공 허난성 서기처는 당무보고를 위해 천비란을 중앙당이 있는 상하이로 파견했다. 젊고 똑똑한 여당원이 허난에서 왔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국공합작 시절이라 국민당 쪽에서도 할 일 없이 찾아와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얼마 후 중공 중앙당은 천비란을 당 중앙선전부로 배속시켰다. 뤄이눙은 상하이로 떠나는 천비란의 손에 편지를 한 통 쥐여줬다. 펑수즈에게 보내는, “천비란을 잘 부탁한다”는 소개장이었다.
모스크바 시절의 펑수즈가 아니었다. 뤄이눙보다 한발 앞서 귀국한 펑수즈는 당서기 천두슈(陳獨秀·진독수)를 대신해 당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펑수즈는 연애사건에 휘말려 한바탕 열병을 앓고 있었다. 상대가 프랑스 근공검학생 시절 멍다얼파의 영수였던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의 부인 샹징위(向警予·향경여)이다 보니 파문이 컸다. 샹징위가 먼저 펑수즈를 유혹했다는 소문이 아직도 지배적이다.

당 중앙위원 회의에서 차이허썬이 책상을 집어 던지며 난리를 부리자 중앙당은 샹징위를 모스크바 동방대학으로 유학 보내는 선에서 끝내버렸다. 모스크바만 가면 연인관계가 끝나 버리던 묘한 시절이었다.

샹징위를 못 잊어 하던 펑수즈는 허구한 날 술만 마셔댔다. 후일의 공산당 서기 취추바이(瞿秋白·구추백)가 “이왕 마시려면 브랜디를 마셔라. 머리가 덜 아프다”고 충고할 정도였다.

중공 창당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던 장궈다오(張國燾·장국도)도 틈만 나면 펑수즈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했다. 류칭양(劉淸揚·유청양)과의 고달팠던 연애담을 들려주며 펑수즈를 위로했다. 류칭양은 프랑스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주더(朱德·주덕)를 공산당에 입당시킨 장선푸(張申府·장신부)의 부인이었다.

펑수즈는 그 와중에서도 뤄이눙의 부탁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선전부에 찾아가 천비란을 잘 도와줬다. “천비란을 만나면 공허함을 달랠 수 있다”는 일기를 남기기에 이르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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