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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diplomacy] 존 무초 초대 대사, 한국전쟁 전에 북의 침공 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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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주한 미 대사는 한국 정치사의 격동의 순간마다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왼쪽부터 대한민국 첫 주한 미 대사 존 무초, 1973년 납치사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숨을 구한 필립 하비브, 10·26 사태 등 격변기를 겪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남북관계에 깊숙이 관여한 스티븐 보즈워스.


주한 미국대사관 웹사이트(http://seoul.usembassy.gov/p_ambs_bios.html)를 보면 한반도에서 근무한 사실상의 첫 미국 대사는 루셔스 푸트(Lucius Foote)다. 그러나 공식 대사 직함을 갖진 않았다. 푸트는 조선왕조가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3년 5월에 들어와 1885년 2월까지 특명전권공사로 근무했다. 당시 푸트 공사가 거주했던 서울 덕수궁 인근 부지는 현재도 주한 미국대사의 관저로 쓰이고 있다.

 미국은 이후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잃을 때까지 7명의 외교관을 대리공사·공사·총영사란 이름으로 조선에 파견했다. 미 외교관이 한국을 다시 찾은 건 41년 뒤인 1946년이다. 광복 뒤 미 군정 시기였던 이때 2명의 총영사가 한국에 머물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임명된 진정한 의미의 첫 주한 미국대사는 존 무초(John Muccio·48~52년 재임)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921년 미국에 귀화한 인물로 홍콩과 중국에서 외교경력을 쌓은 동아시아 전문가였다. 최초 부임일은 한국 정부 수립 이틀 뒤인 48년 8월 17일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의 정식 직함은 대사가 아닌 한국 주재 미국 최고대표였다. 대사로 승격된 건 다음해 4월이다.

 무초 대사는 6·25전쟁 직전인 50년 6월 초 미 의회에서 38도선 부근에서 북한의 침공 가능성을 경고했다. 전쟁 발발 직후엔 한국 정부와 함께 피란을 내려가다 이승만 대통령 일행을 만나 자기 차량에 태우기도 했다.

 주한 미국대사는 60~80년대 한국 정치사의 격동의 순간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주한미군 등을 내세워 한국 정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월터 매카너기(Walter McConaughy·59~61년 재임) 대사는 4·19 혁명 발생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나 하야를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61년 5·16 쿠데타 직후 부임한 새뮤얼 버거(Samuel Berger·61~64년 재임) 대사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쿠데타를 인정하는 미 정부의 의사를 전달하는 대신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의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

 필립 하비브(Philip Habib·71~74년 재임) 대사는 당시 야당 정치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숨을 구했다. 하비브는 73년 김 전 대통령이 납치되자 그 배후에 중앙정보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만일 김대중이 죽는다면 한·미 관계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경고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78~81년 재임)은 10·26 사태와 12·12 신군부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격변기를 직접 목격했다. 신군부의 광주시민 학살을 묵인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그는 회고록에서 “미국은 신군부의 행동에 공모자는 아니었으나 무기력했던 건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제임스 릴리(James Lilley·86~89년 재임)는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 정부의 무력 사용을 막았다. 그는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질 기미가 보이자 전두환 대통령에게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한국 정부가 계엄령 선포 등 군사행동을 취한다면 한·미 동맹을 그르칠 수 있다고 엄포를 놨다. 결국 전 대통령의 강경진압 의지는 꺾였고 이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으로 이어진다.

 제임스 레이니(James Laney·93~97년 재임)는 94년 1차 북핵 사태로 한반도에 조성된 전쟁위기를 걷어냈다. 당시 미 행정부는 북한의 핵무기 생산 의심 지역을 직접 공습할 계획을 세워놓기까지 했다. 이때 레이니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대북특사로 요청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김영삼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극적으로 이끌어냈다. 대사 부임 전인 95~97년 대북 경수로 사업을 관장하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무총장을 지내며 남북관계에 깊숙이 관여해 온 스티븐 보즈워스(Steven Bosworth·97~2001년 재임) 대사는 현재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로 근무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2004~2005년 재임)은 핵과 남북관계 전문 외교관답게 북한·중국·일본 등과 협의해 6자회담을 성사시켰다. 알렉산더 버시바우(Alexander Vershbow·2005~2008년 재임)는 부임 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주러시아 대사를 지낸 역대 주한 미 대사 중 최고위급 인사다.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이임하는 캐슬린 스티븐스(Kathleen Stephens) 현 대사의 후임으로는 성 김 6자회담 특사가 내정됐다. 그는 76년 부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한 뒤 80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한국계 미국인이다. 성 김 후보가 대사로 정식 임명되면 129년간의 한·미 양국 외교관계 중 최초의 한국계 주한 미 대사가 된다.

 이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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