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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프락치로 몬 북한에 분개 … 문 목사 죽음 한 원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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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는 북한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국내의 주사파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문 목사를 안기부 프락치로 몰았다. 문 목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로 인한 화병 때문이다.”


1989년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던 문익환 목사의 사인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94년 1월 문 목사가 숨질 때까지 7개월 동안 바로 곁에서 모시고 함께 일했던 하태경(사진) 열린북한방송 대표에 의해서다. 하 대표는 16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친북 인사로 알려진 문 목사가 1990년대 초반엔 북한의 대남 전략에 반하는 독자 노선을 걷고 있었다”며 “이로 인해 북한은 문 목사를 운동권의 중심에서 제거하려는 공작을 펼쳤다”고 말했다.

하 대표는 인터뷰에서 최근 탈고한 회고록 민주주의는 국경이 없다에 미처 쓰지 못한 문 목사의 만년(晩年) 활동과 대북 인식, 문 목사를 배제하기 위한 북한의 지령과 이를 둘러싼 운동권 내부의 갈등과 암투에 대해 소상히 증언했다. 80∼90년대 친북 학생운동권 핵심에서 활동하다 두 차례 구속 수감됐던 하 대표는 현재 북한 민주화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문 목사를 곁에서 모시게 된 경위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활동을 하다 수감되었는데 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이뤄진 특별사면 때 풀려났다. 서너 달 쉬며 건강을 회복한 뒤 6월께부터 ‘통일맞이’란 단체에 들어가 상근자로 일했다. ‘통일맞이’는 문 목사가 통일문제와 관련한 싱크탱크로 키우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 사무실은 서울 종로5가에 있었고 문 목사와 나 이외에 네댓 명의 상근자가 있었다. 임수경씨나 임종석 전 의원 등도 수시로 사무실에 찾아와서 일을 거들었다. 문 목사와 거의 매일 사무실에서 같이 지내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당시 문 목사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었나.
“문 목사는 당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운동 조직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문 목사가 범민련을 해체하려 한 이유는 태생적으로 많은 한계가 있는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90년 창설된 범민련은 남측본부와 북측본부, 해외본부로 구성되는데 해외본부라는 게 말이 해외동포들의 조직이지 실제로는 북한의 지령을 그대로 집행하는 북한 정권의 하부기구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태로는 1대 2의 구도가 되기 때문에 늘 북한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조직이란 게 문 목사의 판단이었다. 또한 범민련은 실정법(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단체여서 대중성이 취약했다. 그래서 이걸 해체하고 독자적인 통일 조직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게 바로 문 목사가 재야·시민단체들을 규합해 만든 민족회의다.”

문익환 목사가 89년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중앙포토]


-문 목사의 독자 노선에 대한 운동권의 호응은 어땠나.
“당시 문 목사는 운동권의 정신적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인도의 간디 수준이랄까, 문 목사의 권위는 대단했다. 이 때문에 학생운동권 대부분과 재야 단체들이 처음에는 문 목사의 노선을 지지했다. 그런데 그게 하루아침에 바뀌게 된다. 북한에서 날아온 팩스 한 장 때문이었다.”

-팩스 내용은 무엇이며 어떤 경로로 온 것인가.
“나도 그랬지만 당시 운동권 조직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북한과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있었다. 주로 제3국을 통해 팩스를 주고받는 방식이었다. 당시 민족자주 평화통일 중앙회의(민자통)이란 조직이 있었는데 문제의 팩스는 그쪽으로 날아왔다. 민자통 사무실은 ‘통일맞이’ 사무실 근처에 있었는데 60년 4·19 때의 혁신계 인사와 출소 장기수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팩스 발신자는 범민련 북측본부 백인준 의장이었고 당시 유럽에 있던 범민련 해외본부 임인식 사무총장이 중계해 준 것이었다. 내가 민자통 사무실에서 직접 팩스를 봤는데 ‘문익환은 안기부의 프락치’라고 적혀 있었다. 내용은 ‘문 목사가 안기부의 사주를 받아 범민련을 해체하려는 책동을 펴고 있는데 이를 거부하고 범민련을 지켜야 한다’는 요지였다.”

-그 이후 운동권의 분위기는 어떻게 바뀌었나.
“나는 이 팩스를 공개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민자통에서 전국의 주요 운동권 조직과 학생회 등에 전파시켰다. 당시 운동권은 주사파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이 팩스는 향후 운동 지침을 알려주는 교시나 마찬가지였다. 지하조직들은 일사불란하게 이 지시에 따랐다. 그때까지 문 목사 노선을 지지하던 운동권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해 문 목사를 비판하고 나섰다. 재야단체 회의가 열리면 문 목사를 성토하는 분위기로 돌변했다. 문 목사가 마지막 돌아가시던 날에도 그런 성토 모임이 열리기로 돼 있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 이름을 공개하긴 뭣하지만 문 목사 면전에서 ‘당신은 안기부 프락치’라고 비난한 운동권 원로도 있었다. 이를 계기로 운동권 내부에선 소위 ‘범민련 해체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다수 세력인 주사파의 주장대로 범민련은 계속 유지됐다. 하지만 이 논쟁으로 인해 운동권의 분열이 촉발되기도 했다.”

-문 목사는 어떤 반응을 보였나.
“정신적으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루는 자기 방에서 나오며 ‘야, 나더러 안기부 프락치란다’고 말씀하시며 허탈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짓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분이었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격앙된 상태로 계셨다. 문 목사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도 그때 얻은 화병 탓이다. 결국 종북세력들이 문 목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문 목사의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는데.
“고령이긴 했지만 돌아가시던 날까지 건강하게 생활하셨다. 직원들과 저녁 식사를 할 때는 반주를 드시기도 했다. 그날도 아침에 정상 출근한 뒤 집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의학적인 견지에서는 화병이 직접 사인이 아닐지 모르지만 곁에서 지켜본 내 판단으론 화병으로 돌아가신 게 틀림없다.”

-이런 일들을 지금 공개하는 이유는 뭔가.
“나는 그 팩스를 보면서 북한의 실체와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종북세력의 행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한때는 영웅으로 떠받들던 문 목사를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것을 보고 북한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도 없는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직까지 북한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는 종북세력들도 북한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다.”

-곁에서 본 문 목사는 어떤 분이었나.
“나는 지금도 문 목사를 존경한다. 용기 있는 사람이고 젊은이들보다 더 생각이 유연했다. 국제정세도 잘 알았고 외국인들과 영어로 토론했다. 흔히 친북 인사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범민련을 해체하려 한 사실이 말해주지 않나. 장준하 선생과 같은 민족주의자였기에 통일운동에 매진한 것이다. 89년에 방북한 것도 북한 공작에 넘어간 게 아니라 새로운 통일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자기 판단으로 결행한 것이다.”

-자신의 방북 경험에 대해선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얘기했나.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지만 그 당시엔 북한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소외되거나 억압받는 사람이 없고, 지도자와 대중이 융화가 된 사회이며 경제적으로도 우리와 대등한 수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문 목사가 평양에 다녀왔으니 많은 사람이 북한이 어떤 사회인지 물어봤다. 문 목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북한은 우리보다 못 살고, 생활수준이 낮다. 주민들이 김일성 주석을 존경하는 것 같긴 한데 주사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적인 사회는 아니더라’는 게 그분의 지론이었다.”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문 목사가 김일성에게 직접 동진호 납북자들을 남쪽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해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했다. 나중에 북한이 일가족 탈북자인 김만철과의 교환 조건을 내거는 바람에 실천이 안 됐다는 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문 목사와 친분이 깊은 한완상 서울대 교수가 통일부 장관이 됐다. 그때 이번엔 정부 특사 자격으로 문 목사가 다시 방북하는 방안이 논의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문 목사는 김일성에 대해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문 목사는 자신을 프락치로 몰아세운 팩스는 백인준의 명의로 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의 지시로 보내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문 목사가 받은 충격이 더욱 컸다. 자신은 처벌까지 감수해가며 김일성을 찾아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바로 그 김일성이 자신을 프락치로 몰았다는 사실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무렵의 북한은 김정일이 모든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훗날 황장엽 선생 등의 증언으로 명백해진 사실이다. 그러니 문제의 팩스는 김일성이 보낸 게 아니라 김정일이 보낸 것이다. 만약 문 목사가 당시 북한 내부의 권력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면 충격을 덜 받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더 오래 사셨을지 모른다.

문 목사는 오랜 수감 생활 동안 나름대로 건강 비법을 익혀 수지침에 관한 책을 낸 적도 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도 얼굴을 보고 건강 상태를 알아맞히곤 했다. 한번은 문 목사가 ‘김일성은 내가 만나보니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다’고 얘기한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실제론 문 목사가 먼저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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