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은 흔들어 깨우면 금방 일어날 듯한 표정이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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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호 04면

‘대통령 염장이’ 유재철씨의 사무실은 서울 종로구 누하동 주택가 한 빌딩의 지하공간에 있었다. 그가 마네킹을 눕혀 놓고 염습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대통령 염장이’가 처음 입을 열었다. 최규하·노무현 대통령의 시신을 직접 닦고 수의를 입힌 유재철(52)씨.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 때도 염습을 하진 않았지만 식(式)을 진행했다. 무소유의 삶을 산 법정 스님 등 여러 고승도 그의 도움을 받아 이 세상 마지막 목욕을 하고 떠났다. 대통령·고승을 떠나보낸 염장이의 손은 어떨까.

큰스님·대통령 염했던 ‘염장이’ 유재철

“손 좀 만져 봅시다.” 인터뷰에 앞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아봤다. “대통령 염장이 손이라고 별것 있겠습니까.” 그의 손에서 세상을 떠난 전임 대통령의 흔적을 느끼는 것은 무리일까. 평범해 보였지만, 감촉이 유달리 부드러웠다. 손을 보호하기 위해 10월부터 겨울이 지날 때까지 늘 장갑을 끼고 다닌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염장이’라고 낮춰 불렀지만, 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고귀한 일이라며 염을 하는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세상에 처음 나온 대통령 염장이 인터뷰는 그의 사무실 겸 작업실에서 6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어쩌다 ‘대통령 전문 염장이’가 됐나.
“사연이 좀 길다. 2005년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를 다니며 석사 논문을 쓰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사례분석을 통한 한국 단체장에 관한 연구’라는 학위 논문을 썼다. 박정희·윤보선 대통령 등 과거 대통령이나 유명인의 장례절차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있었는데, 대통령 장례 관련 자료는 당시 행정자치부에서 ‘기밀’이라며 보여주지 않았다. 마침 그때 1974년에 돌아가신 육영수 여사의 장례자료가 비밀해제됐다. 육 여사와 김구 선생 자료 등을 찾아 겨우 논문을 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뉴스를 듣고 곧바로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을 찾아갔다. 뭔가 내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대통령 비서들이 있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장례를 집행할 행자부로 갔더니 모두 비상출근해 있었다. 석사 논문 때 인연을 맺은 직원을 만나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잘 왔다’며 최 대통령 장례는 물론 2년 전 돌아가신 영부인 홍기 여사의 이장을 도와 달라고 했다. 최 대통령과 현충원에 합장하기 위해서였다.

왼쪽부터 대전 현충원에서 최규하 전 대통령 하관식, 법정스님 다비식,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중앙포토]

당시 내가 동국대 장례문화학과 외래교수 신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국민장 장례 연구에 필요하다며 박정희·윤보선 전 대통령의 자료를 요청했더니 이번엔 기밀이지만 순순히 주더라. 역대 대통령과 총리 등의 장례 자료가 40건이 넘었다. 이틀 동안 밤을 새워 공부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최 대통령 시신 염습은 물론 전체 장례일정을 맡게 됐다. 이게 인연이 돼 노무현·김대중 대통령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를 지낸 분이 있지 않나. 그분이 도와줄 수 있지 않았을까.
“광화문 교보문고와 종로2가 사이에 중앙장의사라고 있었다. 그곳에서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윤보선 대통령 장례를 모두 진행했다. 하지만 이후 장의업를 하시던 분이 세상을 뜨고, 후손들도 가업을 잇지 않아 경험이 전수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 때 얘기도 해달라.
“탤런트 여운계씨가 숨진 다음 날이었다. 오전 10시쯤 여운계씨 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에 문자가 난리를 쳤다. 노 전 대통령이 고향 봉하마을에서 추락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염을 끝내고 곧바로 짐 챙겨 직원들과 함께 KTX를 탔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내려가는 길에 최규하 전 대통령 장례 때 인연을 맺은 공무원들에게 전화했더니 “연락 잘했다. 도 와 달라”며 현장의 직원을 연결시켜줬다. 밀양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양산 부산대 병원까지 달렸다.

장례식장 안치실에서 흰 천을 뒤집어쓴 노 전 대통령을 시신으로 처음 만났다. 황망했다. 일단 병원에서는 염습 없이 광목으로 옷을 갈아입히는 간단한 수시((收屍)를 한 뒤 관에 모셨다. 봉하마을로 시신을 옮긴 뒤인 둘째 날 새벽 2시 동료 두 명과 시신 ‘엠바밍(embalming)’에 들어갔다. 일종의 방부처리 작업이다. 혈액을 모두 빼내고 혈관에 포르말린 희석액을 주입시키는 거다. 냉방 장치가 따로 없는 마을회관에서 7일장을 진행하려면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 3일째 새벽 2시에 염습을 했다. 그때 노 대통령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신념과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염습 때 유족들이 참관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들 건호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짝 않고 눈물만 글썽이며 묵묵히 지켜봤다. 하지만 권양숙 여사는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딸 정연씨가 권 여사에게 우리 약속했잖아. 쿨하게 아버지 보내 드리자고 말했다.”

-노제 때 나왔던 그 많은 만장도 직접 준비했나.
“말하자면 ‘지휘’를 한 거다. 행안부에서 노제에 쓸 만장 2000개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장에 쓸 대나무 2000개도, 만장에 쓸 글씨도 하루 이틀 만에 쉽게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기적처럼 이틀 만에 만장 2000개를 모두 완성했다. 노 대통령 노제 만장에 쓸 대나무를 찾는다고 하니 담양에서 ‘얼른 가져가시라’며 대형 트럭에 대나무를 가득 실어 보내줬다. 만장 글씨는 조계사에서 1200장, 개인적 인연이 있는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800장을 써줬다. 노 대통령 만장을 만든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의 서예가들이 몰려들었다. 장관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 날, 발인 전날이었다. 오후 2시 행안부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큰일났다. 대나무 막대를 PVC 파이프로 바꿔야겠다”고 했다. 만장 막대기로 쓴 대나무가 죽창으로 변신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도리가 없었다. 밤을 새워 결국 대나무 막대기를 PVC로 모두 바꿔 만장을 달아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어떻게 했나.
“내가 대통령 장례를 두 번이나 연거푸 맡게 되자 당연히 다른 곳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실 땐 전국 10개 대학의 염실습 교수들과 상조회사에 비상이 걸렸다. ‘대통령 장례를 치른 상조회사입니다’ 하고 광고하면 얼마나 홍보가 잘 되겠나.

2009년 8월 18일이었다. 동국대에서 노 전 대통령 장례 절차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었다.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데, 김 대통령 서거 소식이 들렸다. 노 대통령 장례 세미나가 졸지에 묵념식으로 변했다. 세미나 중간에 빠져나와 가방을 들고 빈소가 차려진 신촌 세브란스로 달려갔다. 이전에 만났던 행안부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들 경황이 없었다. 게다가 상조회사 인사들이 나타나 서로 ‘이번 장례는 우리가 맡았다’고 주장했다.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씨가 알아서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염습을 맡겼다. 나는 그 길로 빈소 옆에 차려진 행안부 상황실로 불려 들어갔다. 장례 자문역을 맡으라고 했다. 결국 이후 국회의사당 분향소와 영결식, 시신 안치 등의 남은 장례절차를 도맡게 됐다.”

-대통령 장례를 세 번이나 치렀으면 돈도 많이 벌었겠다.
“글쎄, 누가 나보고 올해부터 운이 트인다고 하더라. 하지만 여태껏 난 내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국장·국민장이란 게 결국 국가에서 장례를 치르는 대규모 행사여서 혼자 할 수도 없고, 장례비용도 국가 규정에 따라 빠듯하게 지급하기 때문에 국장 치르고 돈 번다는 건 현실과 거리가 먼 얘기다. 대규모 상조회사라면 국장 치른 유명세로 회원을 많이 모아 돈을 벌겠지만 난 아내를 포함해 직원 세 명을 두고 일할 뿐이다. 많아야 한 달에 15번 장례를 치르는 정도다.”

-후일을 위해서라도 대통령 장례를 치른 경험을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국장·국민장을 치른 뒤 행안부에 각종 장례자료를 모두 제공했다. 행안부가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장례에 관한 소상한 기록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도 개인적으로 정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지금은 박사 과정 중이라 여유가 없다. 학위를 받고 난 뒤 그간의 경험을 정리해 책으로 묶어내고 싶다.”

-대통령 외에도 유명인 장례를 많이 치렀다고 들었다.
“법정 스님, 법장 스님, 서경보 스님 등 큰스님들 장례를 많이 치렀다. 그 외에도 2003년 투신자살한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 멕시코 칸쿤에서 자살한 농민운동가 이경해씨 등의 염습과 기타 장례절차도 내가 진행했다.”

-법정 스님 장례 땐 어땠나.
“2009년 12월 말 아내와 함께 전남 순천의 송광사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스님들과 그간 치렀던 큰스님들 장례 얘기를 나눴다. 그때 주지 스님이 ‘법정 스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다’며 장례계획을 한 번 짜오라고 했다. 송광사는 법정 스님이 오래 계시던 곳이다. 기획안을 세 번 고쳐야 했다. 법정 스님의 유지를 받드는 게 어려웠다.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불질러라, 관은 쓰지 마라, 화려하게 하지 마라, 사리도 챙기지 마라’는 게 스님의 뜻이었다.

2010년 3월 11일 법정 스님이 돌아가셨다. 법정 스님은 마치 편안하게 주무시는 것 같았다. 흔들어 깨우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스님은 수의를 원치 않으셨다. 몸을 깨끗이 닦아드린 뒤 평소 입던 깨끗한 옷을 골라 입혀드렸다. 그 위에 붉은 가사를 덮었다. ‘관도 쓰지 마라’ 하셔서 평소 쓰시던 대나무 평상에 판자조각을 대 그 위에 스님을 눕혀드렸다. 송광사 위쪽 다비장을 지내는 곳까지 15도 경사를 불안하게 올라가야 했다. 다비장을 끝내고 유골을 직접 수습했다. 스님 뜻에 따라 사리도 챙기지 않았다. 대충 큰 유골만 수습한 뒤 재는 삽으로 퍼냈다. 법정 스님의 아들 격인 상좌 스님 7명이 유골을 나눠서 곳곳에 뿌렸다. 부도탑 같은 건 없었다. 말 그대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온몸으로 느꼈다. ”

-대체 무슨 인연인가. 언제 왜 장의업을 시작했나.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스물일곱 살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아파트 새시 설치, 방화문 제작, 의류사업…. 그런데 하는 일마다 잘 안 됐다.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3개월을 집에 누워 있었는데, 어머니가 나를 챙기셨다. 날마다 안암동 고려대 뒤쪽 개운사에 가서 나를 위해 불공을 드리셨다. 그게 인연이 돼 나도 개운사에 가서 스님들과 얘기를 많이 나누고 힘을 얻어 다시 일어섰다.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던 중 전라도 광주에서 장의업을 하는 친구를 알게 됐다. 당시엔 젊은 장의사는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나이 많은 동네 장의사들이 염습하기 전에 술 마시고, 팁 뜯고, 바가지 씌우는 어지러운 악습이 일상적이었다. 그 친구는 그런 악습을 깼다. 보기 좋았다. 친구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염을 잘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악착같이 배웠다. 서른다섯 살에 독립을 했다. ‘동네 장의사’보다는 뭔가 특색 있는 장의사가 되고 싶었다.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와 제일은행 본점 사이에서 처음 장의사를 시작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침 그때 큰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셨다. 큰스님 장례를 한 번 치르면 손님이 수천 명씩 왔다. 이런 대규모 5~7일장을 10년 넘게 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스님들과의 인연 덕분이다.”

-우리나라 장례문화의 잘못된 점을 꼽자면.
“장례가 너무 형식에 얽매이면 안 된다. 형식과 전통은 원래 실용에서 시작한 것이다. 형식이 생겨난 원뜻을 이해해야 한다. 예전에 최소 5~7일장을 했던 이유는 찾아오는 손님을 배려해서다. 교통이 안 좋았던 시절에 많은 조문객을 맞으려면 장례일정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임금님 장은 5개월 동안 하기도 했다. 옛날에 시신에 수의를 겹겹이 입히고, 다시 이불로 싼 뒤 꽁꽁 묶었던 이유는 시신이 썩어 냄새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요즘은 수백만원 이상 하는 고급 향나무 관을 쓰는 사람이 많지만 옛날엔 오동나무 관을 최고로 쳤다. 시신이 빨리 썩어 흙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잘 썩고 재질이 약하며 가벼운 오동나무 관이 최고다. 소나무는 송진 때문에 잘 안 썩고, 향나무도 땅속에 들어가면 30~40년 썩지 않는다. 묘 주변에 물이 차면 더 안 썩는다. 장례식의 주인은 상주가 아니라 고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아무리 프로 장의사이지만, 염을 하는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는 말은 좀 어색하게 들린다.
“나는 영혼의 존재를 느낀다. 염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는 일이다. 유족들이 울면 울수록 나는 반대로 이상하리만큼 냉정해진다. 염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잡념이 없어지고 몰입하게 된다. 염을 하는 것은 고귀한 직업이다. 이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부심을 느낀다. 옛날엔 며느리나 아들이 직접 염을 했다는 점을 생각해 봐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하니, 삶에 대한 견해가 남다를 것 같다.
“평소 ‘엔딩 노트(Ending Note)’를 작성하는 습관을 권하고 싶다. 즉 자신이 죽으면 장례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떤 말을 남길 것인지 등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고 이해하고 나면, 삶을 더 야무지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대통령의 마지막 날을 털어놓게 된 계기라도 있나.
“그간 여러 곳에서 인터뷰 요청이 있었지만 어떤 매체에도 응하지 않았다. 고인과 유족에게 실례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조회사 곳곳에서 ‘전직 대통령들의 장례를 진행했다’는 거짓 홍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이젠 나서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전직 대통령 중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의 2주년 기일이 지난 점도 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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