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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과학수사? 채취 지문 절반 쓸모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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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 지난달 19일 오전 서울 사당동 단독주택에 사는 50대 여성이 운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다 강도와 마주쳤다. 강도는 이 여성에게서 다이아반지 등과 현금 23만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지문 2점을 경찰청 과학수사센터에 감정 의뢰했으나 ‘지문의 융선이 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감정 불능 통보를 받았다.

 #2. 지난달 10일 광주광역시 월곡동 도로에서 길을 걷고 있던 30대 여성이 괴한에게 납치됐다. 괴한은 그녀에게서 카드를 뺏은 뒤 200여만원을 인출해 달아났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지문 1점을 채취했다. 과학수사센터에 감정 의뢰했으나 지문 상태가 불완전한 조각 지문, 이른바 ‘쪽지문’이라 감정할 수 없는 수준이란 판정을 받았다.

 범인 검거에 있어 중요한 열쇠이자 1차 단서인 범죄 현장의 지문들이 절반 정도 무용지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박대해(부산 연제) 의원이 14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범죄 현장 유류지문 감정 현황’에 따르면 2008년부터 올해 7월까지 3년간 수사 의뢰된 8만1705건의 지문 가운데 49%인 4만67건이 사실상 수사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자료에 따르면 지문 상태는 명확하지만 경찰 데이터베이스(DB)에 자료가 없어 누구의 지문인지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2만7765건(34%), 아예 감정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1만2302건으로 전체의 15%에 달한다. 서울지방경찰청 관할 지역에선 총 2만2339건의 지문 중 인적사항을 확인하지 못한 지문이 7406건(33.0%), 감정 불능이 3312건(14.8%)으로 나타났다. 경기지방경찰청의 경우 총 1만9668건 중 32.4%인 6387건에 대한 인적사항을 확인하지 못했고, 감정이 불가능한 지문은 17.7%인 3491건으로 집계됐다.

 지방청 중 감정 실패율이 가장 높은 곳은 충남지방경찰청으로 54.8%였으며 이어 전남청·인천청·충북청·경북청 순이었다. 감정 실패율이 가장 낮은 곳은 전북청이었지만 실패율이 45.8%에 달해 지방청별 편차는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대해 의원은 “최근 감식 기술이 크게 발전했는데도 사건 현장에 남은 지문의 절반가량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현장에 나간 경찰관이 감정 기준에 맞춰 지문을 확보하지 못하는 등 초동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지문 하나 감정하는 데 평균 보름 정도 소요되는 상황에서 인력·예산 낭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1990년대에 비하면 초동수사 기술이 많이 보완됐지만 현장에서 지문이나 발자국이 덧씌워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살인이나 방화사건의 경우 신발 흙, 섬유질 등을 통해 피의자가 특정될 수 있음에도 이 부분을 간과해 수사가 장기화되는 점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이지상 기자

◆유류 지문=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지문 가운데 경찰관 등 관계자 지문을 제외하고 범인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지문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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