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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장효조에게 명예의 전당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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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장효조가 갔다. 고교야구 전성기를 맛본 내 또래 중년들에게 고인에 대한 기억은 아무래도 프로보다는 고교 시절이 더 강렬하다.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 시절 장효조는 정말 엄청나게 잘 쳤다. 키 174㎝, 체중 70㎏. 선수치고는 자그마한 몸인데도 1974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5할을 때려 타격상을 받았다. 그해 네 번의 고교야구대회를 통틀어 3할8푼3리를 기록했다. 한양대 2학년이던 76년 백호기대회 때는 무려 7할1푼4리(14타수 10안타)를 기록했다. 프로로 전향한 뒤에도 여전히 ‘안타 제조기’였다. “3할을 치지 못하면 은퇴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다 92년 타율이 2할대로 떨어지자 미련 없이 은퇴를 선언했다. 프로 통산타율 0.331은 아직 누구도 깨지 못하고 있다.

 55세라면 요즘엔 요절(夭折)이다.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그제 프로야구 경기장 분위기는 숙연했다. 대구구장에는 ‘레전드(legend·전설) 장효조님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걸렸다. 고인의 현역 시절 영상이 전광판을 장식했다. 삼성·한화 선수들이 고개 숙여 선배를 추모했고, 특히 삼성은 치어리더들도 내보내지 않았다. 팬들 사이에서는 추모 동상 건립운동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희대의 타격 천재를 이 정도로 잠깐 애도한 뒤 며칠 지나 잊어버리면 그게 다일까. 수많은 국민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고 떠난 스포츠 영웅이 어디 장효조뿐일까. 정치·경제·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큰 인물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일이 이미 보편화돼 있다. 유독 스포츠 분야만 영웅 모시기에 인색한 풍토가 안타깝다. 나는 ‘영웅’과 ‘스타’는 구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김연아·박태환 같은 현역 스타에게는 돈과 명예, 국민적 관심을 보내면서도 장기적 관점에서 사회의 롤(role) 모델로 남을 만한 전설적 영웅들은 기릴 줄 모른다. 기억은 물론 기록과 유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다. 우리도 ‘스포츠 명예의 전당’을 하나쯤 가질 때가 됐다는 얘기다.

 근대 스포츠 역사가 100년을 넘은 만큼 몇몇 개별 종목은 명예의 전당이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축구는 2005년 서울월드컵경기장 내 2002월드컵기념관에 ‘축구 명예의 전당’을 이미 만들었다. 김용식·홍덕영·이회택 등 7명이 1차로 헌액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한국야구박물관’을 구상하고 있지만 입지 선정 작업조차 지지부진이다. 아마추어 쪽의 대한야구협회도 서울 고척동에 건립 중인 돔구장 안에 ‘야구기념관’을 만들 계획이나 공사 자체가 마냥 늦춰지고 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스포츠가 어디 축구·야구뿐인가. 비인기 종목과 사회체육도 아우르는 종합적 스포츠 명예의 전당이 꼭 필요하다. 캐나다·호주·스코틀랜드 같은 곳은 스포츠 명예의 전당을 이미 갖고 있고, 미국은 미식축구·야구·농구·테니스 등 종목별 명예의 전당 외에 ‘올림픽 명예의 전당’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스포츠 영웅은 성(性)·나이·계층·지역이나 좌우, 진보·보수를 초월한 순수한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갈기갈기 찢긴 우리 사회를 통합하는 순기능이 엄청나다. 청소년들의 역할모델로도 안성맞춤이다. 권민혁(단국대 체육교육학과) 교수의 지적처럼 상업주의·국수주의로 치우칠 위험성만 배제한다면 스포츠 영웅 선정, 명예의 전당 건립 작업은 지금 당장 시작해야 마땅하다.

 대한체육회도 다음 달 충북 진천에 국가대표종합훈련원(제2선수촌)이 문을 열면 시설에 여유가 생기는 태릉선수촌 자리 등 명예의 전당 건립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와 각계의 제도적·경제적 뒷받침이 중요하다. 나는 장효조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다. 그의 유니폼·방망이가 손기정 등 전설적 선배들의 유품과 나란히 전시된 ‘영웅들의 집’을 하루빨리 만나 보고 싶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