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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의 발은 모두 갈대로 만들라’ 태종이 명한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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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가마발. 위의 것은 곱게 다듬은 대나무살에 붉은 물을 들이고 연두색 명주실로 맸다. 조선 왕실의 가마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사진은 거친 대나무살을 면실로 엮고 비단 술을 달았다. 조선후기~근대 시골 마을 혼례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엔 사극에도 실커튼을 쓴다. 원래는 주렴(朱簾·붉은 발)이 걸려야 할 자리다. 잘게 다듬은 대나무나 갈대를 엮어 만든 ‘발’은 궁궐부터 민가까지 쓰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헤지기 쉽고 보존이 어려운 귀한 옛 발을 한 자리에서 조명하는 전시가 마련됐다. 서울 명륜동 짚풀생활사박물관은 6일부터 25일까지 ‘발’ 특별전을 연다. 인병선 관장이 수집한 조선시대 발부터 현대 작품까지 70여 점을 선보인다.

 『삼국사기』 신라편에는 진골·육두품 등 계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발의 재료와 문양을 적어놨다. 삼국시대에 이미 발이 위계를 드러내는 데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오례(五禮)에 왕비의 대연(大輦·가마)에는 “주렴(朱簾)을 사면에 드리우고 녹색 실로 귀문(龜紋·거북 등딱지 문양)을 만들고, 가에는 녹색 저사로 선을 두른다”고 되어 있다. 인 관장은 “조선왕실의 주렴은 사전에 나오듯 구슬로 엮은 주렴(珠簾)이 아니라 주홍(朱紅)을 바른 발”이라고 설명했다. 구슬 주렴은 중국식이다.

 궁중에서 화려한 발만 쓴 것은 아니다. 태종 11년에 왕이 궁중의 발을 모두 갈대발로 하도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손이 많이 가고 비싼 대나무발 대신 청빈을 상징하는 갈대를 사용해 재정을 아꼈던 것이다.

 조선의 가부장제는 집안에 고립됐던 여인들을 발 뒤로 물러나게 했다. 여염집 여인의 모습은 발에 비친 실루엣으로만 볼 수 있었다. 당시 최대의 구경거리였던 중국 사신 행렬 땐 2~3일 전부터 길가에 발과 장막이 담을 친 듯 이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어두운 발 뒤에서 여인들이 천하를 호령하기도 했으니, 바로 어린 왕 대신 발을 치고 할머니나 어머니가 통치한 ‘수렴청정(垂簾聽政)이다. 어두운 발 뒤쪽의 대왕대비는 발 앞의 신하들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으나, 신하들은 대왕대비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수렴청정은 통치자에게 유리한 구조였던 것이다. 02-743-8787.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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