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 최후의 날 生死의 기로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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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하순 월남의 수도 사이공. 미국 대사관 내 중앙정보국(CIA)
정보 분석요원인 프랭크 스넵은 사이공의 다른 비밀공작원들과 마찬가지로 월남 정권이 붕괴하고 월맹이 보복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과 정보원들을 국외로 탈출시킬 방법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월맹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대사관은 북새통을 이뤘다. 28일 오후 스넵은 한때 연인 사이였 으며 자신의 아들을 낳았다는 베트남人 ‘찻집 아가씨’ 마이 리의 전화를 받았다. 마침 대사에게 올릴 보고서 작성에 바빴던 스넵은 그녀에게 한 시간 후 다시 전화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이 리가 다시 전화했을 때 스넵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그 후 스넵은 그녀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 후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 마지막 소개 작전을 위한 첫번째 헬기가 도착했을 때 방탄복을 입고 M16으로 무장한 스넵은 대사관 담을 넘어 들어오려는 난민들을 담 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피신처를 찾던 베트남人 중에는 스넵과 안면이 있던 사이공의 경찰관이 있었다. 그는 스넵에게 마이 리와 그녀의 아들이 죽어 쓰러져 있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주변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고 자살한 것 같았다는 것이다.

씁쓸한 기억들은 오래 남게 마련이다. 제럴드 포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 홀로 앉아 TV 화면을 통해 대사관 지붕에서 이륙하는 헬기들을 지켜보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최근 뉴스위크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이 월맹에 패해 쫓겨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그 날은 내 생애 가장 슬픈 날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포드는 미군 병사 단 4명의 희생으로 5만 명의 월남人과 6천 명의 미국인을 구출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미국에 협조해오던 수만 명의 베트남人이 그곳에 남겨진 채 사살 또는 투옥되거나 ‘재교육’ 수용소로 보내졌다는 사실이 여전히 그를 괴롭힌다.

1975년 4월 30일의 사이공 함락은 미국이 가진 힘의 한계를 상기시켜주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미국의 세기였던 20세기의 치욕적 사건이었다. 사이공 함락 당시 백악관 상황실을 책임지고 있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국가안보담당 부보좌관은 “미친 듯한 혼란의 도가니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이공 함락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아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베트남전 현장에서 도덕적 모호성과 암울한 부조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던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날은 아직도 당위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전쟁이 종식된 날이자 숭고한 대의가 종말을 맞은 날이기도 했다. 또 미군 파병 후 10여 년 동안 5만8천 명의 미국인 희생자를 내고, 내전이 계속된 35년 동안 3백만 베트남人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 소모전의 마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선 아직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대통령 시절 이루어진 전쟁 개입 결정에서부터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그의 외교정책 담당 수석 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에 의해 비밀리에 진행된 점진적인 확전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전의 모든 측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포드 대통령과 그의 내각 및 사이공에서 활동하던 외교관·군인·첩보요원 등 종전 당시 주역들은 아직도 당시 상황의 책임 소재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 제럴드 포드 대통령 기념 도서관에 의해 공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패배를 최대한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한편 상충되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상황을 판단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의 본무대는 역시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의 악몽 같은 최후의 날들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세 사람의 생생한 기억을 통해 그 때를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나온 죄책감에 시달리는 CIA 요원 프랭크 스넵과 월맹의 첩자로 활동하면서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미국인들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던 타임誌 현지 특파원 팜 수안 안, 그리고 사이공 최후의 날 처음으로 전투비행에 나섰던 헬기 조종사 대럴 브라우닝 중위의 증언을 듣는다.

▶한 시간 후 다시 전화하라

노스캐롤라이나州 출신의 스넵은 한때 그레이엄 마틴 대사를 숭배했다. 구식 외교관 스타일에 명석하고 편집증적 증세를 갖고 있던 마틴은 1973년 사이공으로 떠나기 앞서 부대사에게 “공산주의자들에게 순순히 져주기 위해 베트남에 가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당시 20대 후반이던 스넵은 마틴이 처음 부임했을 때 그의 딸과 잠시 사귄 적이 있다. 스넵은 “재닛 마틴은 내가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고 말했다”며 “당시에는 최대의 찬사로 들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1975년 봄에 이르자 마틴은(스넵을 비롯한 대사관의 대다수 젊은 관리들 눈에)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월남을 월맹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1950년대 극소수의 고문단을 파견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후 1968년 50만 명 파병으로까지 확대됐던 미국의 군사 지원 규모가 서서히 줄고 있었다. 미국은 1973년 월맹과의 휴전협정에 따라 마지막 지상군을 이미 철수시킨 상태였고 월맹군의 보복공격을 염려한 월남군 병사들은 군복과 군화를 벗어던지고 도망쳤다.

스넵과 그의 동료들은 마틴의 판단을 드러내놓고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5년 4월 월맹군이 점점 가까워오자 대사는 부하들의 사소한 반항적 행동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스넵을 비롯한 젊은 CIA 관리들이 비밀리에 대사관의 문서들을 태우기 시작했을 때 마틴은 화를 냈다.

그는 문서를 태운 재가 대사관의 수영장을 더럽히고 자신의 리무진 승용차 지붕에 먼지를 쌓이게 한다고 불평했다. 그는 스넵 일행에게 그같은 행동은 패배를 자인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며 패배주의자처럼 굴지 말라고 했다. 당시 스넵은 마틴의 말을 따랐지만 지금은 “그의 옷깃이라도 잡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할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스넵의 추측은 그가 4월 17일 CIA의 한 안가에서 한 정보원을 만났을 때 공포에 찬 확신으로 바뀌었다. 변절한 공산주의자인 그 정보원은 월맹이 5월 19일(월맹의 혁명지도자 호치민의 생일)
까지 사이공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최후의 공격은 노동절인 5월 1일 개시될 것이라고 했다.

마틴 대사는 스넵이 그 정보원의 경고를 입에 올리자 “내게는 더 정확한 정보가 있다”며 그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마틴은 연립정부의 구성을 희망하는 프랑스측과 비밀리에 회담을 해오던 참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워싱턴의 포드 행정부에도 닥쳐올 재난에 대한 경고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은 잔류 미국인을 1천2백50명(하루 내에 헬기로 소개시킬 수 있는 인원)
으로 줄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서는 수송기들이 하루 종일 수천 명의 난민을 실어날랐다. 정부 관리와 그 부인 및 하인들, 그리고 술집 접대부와 그들의 혼혈 자녀 등 20만 명의 ‘위험에 처한’ 베트남人들중 일부였다.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든 필요한 서류를 갖춘 사람은 모두 비행기에 태웠다.

그러나 철수 작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국방부는 미국인을 최대한 빨리 탈출시키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 신뢰도를 염려한 키신저 국무장관은 미국인뿐 아니라 베트남人들의 목숨도 함께 구하는 점진적이고 질서있는 철수를 원했으며 포드 대통령도 키신저의 의견을 지지했다.

국방부는 사이공까지 수송기 왕복 운항을 시작했지만 공포 분위기가 조성될 것을 우려한 사이공 대사관의 외교관들은 곧바로 미국인들이나 고위 월남 관리들을 수송기에 가득 태우지 않았다. 키신저는 사이공이 함락되고 많은 미국인들이 그곳에 발이 묶여 살해될 경우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국방부 내 숙적들의 음모에 걸려든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매일 사이공을 떠나는 C141 수송기에 빈 좌석이 있었다는 사실이 서류상으로도 명백히 기록돼 있었다. 그것은 사망자가 생길 경우 그 책임이 국방부 외의 누군가(마틴 대사나 나)
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포드 대통령 역시 수송기들이 반쯤 빈 상태로 사이공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포드는 뉴스위크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고 회상했다. 워싱턴의 고위 관리들은 마틴 대사가 철수계획에 늑장을 부리고 있다고 비난했고, 마틴은 워싱턴의 형편없는 리더십과 관료적 형식주의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많은 베트남人들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행정 절차에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은 4월 21일 미군 철수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사임했다. 그는 사임 연설에서 “미국은 미국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우리에게 미룬 채 도망쳤다”고 말했다. 스넵은 티우 대통령이 대만행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그를 차에 태워 공항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스넵은 티우의 가방들을 차 트렁크에 실을 때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며 금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스넵은 티우를 차에 태우고 사이공 거리를 달리면서 자신의 안전이 걱정됐다. 그는 자신의 자동차가 티우의 적들로부터 공격받을 것을 우려해 ‘완전무장’한 채 좌석 아래 권총을 넣어 두었었다고 말했다. 차의 라이트를 꺼놓은 채 공항 정문을 지나 달리던 그는 어두운 활주로에서 톰 폴가 CIA 사이공 지국장을 칠 뻔했다.

스넵은 뒷좌석에 있던 티우가 자신과 악수하기 위해 앞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 ‘스카치 위스키 냄새’가 났던 것과 그가 비행기에 오른 뒤 마틴 대사가 “화난 모습으로 비행기에서 사다리를 홱 잡아당기던 것”을 기억했다.

4월 마지막 주 들어 스넵은 하루 2시간 이상 자지 못해 머리 속이 멍한데다 초조한 날들을 보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에어 아메리카’라는 위장 명칭으로 알려진 정보국의 비밀 항공기로 베트남人 협력자들을 ‘불법 공수’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그는 또한 대사에게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확신시킬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너무 바빴다는 핑계는 마이 리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없애기엔 충분치가 않다.

조각 같은 몸매에 1m80cm가 넘는 마이 리는 창녀들이 서양 남자들에게 ‘사이공 茶’(베트남의 술집 여자들이 매상을 올리려고 손님 옆에서 마시는 차)
와 몸을 파는 술집의 호스티스였다고 스넵은 후에 기술했다. 스넵과 마이 리의 로맨스는 1973년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불 붙었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거의 2년 후 스넵 앞에 아기를 안고 나타난 그녀는 아이가 그의 자식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지금 그는 자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처음에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어색하게 아이를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

그 사진을 찍은 후 얼마 안돼 마이 리와 아이는 다시 종적을 감췄다가 사이공 탈출 최후의 날을 하루 앞두고 다시 나타났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전화해. 기꺼이 도울 테니”라고 스넵은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한 시간이 지나서 자기 책상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녀의 메시지만이 남아 있었다. 메모지엔 “당신이 이럴 줄은 몰랐다”고 쓰여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인 4월 29일 4시, 그는 멀리서 일어난 폭발의 진동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탄조끼를 입었다. 월맹군이 불과 몇 마일 밖에 있던 탄손누트 공항을 포격하고 있었다. 최후의 공습이 시작됐던 것이다.

▶친구와 적

당시 워싱턴은 오후 4시였고 스코크로프트가 백악관에서 회의 중이던 포드 대통령에게 쪽지를 전했다. 두 명의 해병이 사망했고 마지막 남은 탄손누트 공항도 겁에 질린 피난민들이 활주로를 막고 있어 사용할 수 없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사이공 탈출을 위한 최후의 헬리콥터 공수작전을 뜻하는 ‘잦은 바람’(Frequent Wind)
작전을 개시할 시각이었다. 라디오 사이공에서 방송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포위된 사이공 시내에 울려퍼졌다. 모든 미국인들은 탈출 지점으로 향하라는 신호였다.

美 대사관 앞마당은 완전히 수라장이었다. 해병들은 거대한 타마린드 나무를 베어내고 헬기 착륙 공간을 확보했다. 대사관 담장 밖은 겁에 질린 수천 명의 베트남人들로 인산인해였다.

해병들은 그들이 철조망을 넘으려 할 때마다 밀어내고 있었지만 스넵과 다른 대사관 직원들은 베트남人들을 대사관 안으로 무조건 끌어들였다. 그 중에는 바로 그 날 아침 마이 리와 어린 아들의 시체를 발견한 사이공 경찰도 있었다.

모자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은 스넵은 혼란에 빠진 대사관 내 CIA 6층의 지휘본부로 후퇴했다. 무언가 할 일을 찾던 그는 암호화된 방송을 내보내는 CIA의 무전망 ‘다이아몬드 넷’의 조작을 도왔다.

몇몇 CIA 고위 직원들은 대사관 밖에 있는 여자 친구들을 포함한 30명의 부양 가족들을 구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스넵은 몇 블록 떨어진 기아롱 거리 22번지에 있는 CIA 지부 부국장의 아파트로 ‘에어 아메리카’ 헬리콥터를 급파했다. 헬리콥터는 위험하게도 그 건물의 좁은 지붕 위에 착륙해 그 곳에 모이도록 통보된 30명의 낙오자들을 태우기로 돼 있었다.

그 구출 광경의 사진은 사이공 함락의 상징이 됐다. 모두를 태우기엔 너무 작아보이는 헬리콥터를 향해 사람들이 무너질 것 같은 계단을 줄지어 올라간다. 사진에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 중 마지막일 듯한 사람이 바로 트란 킴 투엔 박사다.

사이공의 비밀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오랫동안 CIA의 정보원이던 그는 사이공을 탈출하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었다. 그의 탈출은 이 최후의 날에 있었던 가장 극적인 이야기 중 하나로, 그를 구해준 미국 시사지 특파원이자 월맹군 첩보원이었던 인물의 이야기는 적군과 아군의 경계가 모호했던 이 전쟁의 혼란상을 보여준다.

그 날 대사관에 전화해 자신의 CIA 담당자를 찾은 투엔 박사는 담당관이 이미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생명에 위험을 느낀 그는 사이공에서 가장 인맥이 넓다는 친구 팜 수안 안을 찾아갔다.

지난 10년간 안은 뉴스위크 기자들을 비롯한 여러 기자들에게 특종과 기삿거리를 제공하며 타임誌 특파원으로 일해왔다. 미군 브리핑에 참석을 허가받은 몇 안 되는 월남人 중 하나였던 그는 모든 소문과 음모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보에 너무나 밝은 그를 CIA 요원일 것으로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그는 월맹군 대령이었다. 약 한 달에 한 번 그는 비밀 아지트로 가거나 사이공 밖으로 빠져나가 월맹측 접선자에게 미국과 월남 정권의 전략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넘겨줬다. 안은 기자로 위장한 직분을 지키는 데도 주도면밀했다.

그는 결코 타임誌나 다른 미국 기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미국 캘리포니아州 오렌지 카운티에서 전문대학을 다녔던 때라고 말했다. 안은 1945년 18세의 나이로 혁명에 가담했지만 민족주의자였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고국을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월맹군의 전면 공격에 가족들이 죽음을 당할까봐 두려웠던 안은 아내와 아이들을 외국으로 피신시켰다. 그는 연립 정부가 공산주의 지배 체제로 평화롭게 이양되길 바라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천성적인 음모가인 투엔 박사와 함께 티우 대통령 후임으로 공산정부에 받아들여질 만한 인물을 찾았다.

그러나 사이공 최후의 날, 오래된 콘티넨털 팰리스 호텔 안의 타임誌 지국 사무실에 있던 안은 양쪽을 자유로이 넘나들던 자신의 특기가 벽에 부닥친 것을 느꼈다. 그는 월맹군이 사이공을 함락시킬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사이공 교외에서 전투가 벌어져 월맹군의 선봉 부대가 월남군의 마지막 잔당을 소탕하고 있었다. 그때 안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자신의 친구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호치민市가 된 사이공의 자택에서 뉴스위크와 인터뷰한 안은 투엔 박사가 얼마나 겁에 질린 모습이었는지를 회상했다. 안은 투엔을 자신의 낡은 르노 승용차에 싣고 美 대사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군중에 둘러싸여 도저히 대사관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곳 저곳에 미친 듯이 전화를 걸던 안은 대사관으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한 미국 기자를 만났다. 그 기자는 투엔에게 CIA의 안가(安家)
인 기아롱 거리 22번지의 아파트로 가서 보고하라는 말을 전했다. 바로 프랭크 스넵이 보낸 에어 아메리카 헬리콥터가 대기하고 있는 곳이었다.

안과 투엔이 도착했을 때 건물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안은 거칠고 무표정한 경비에게 폴가 CIA 지국장을 들먹이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경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무렵, 그는 주머니 안에서 권총의 감촉을 느꼈다고 말했다.

바로 그때 경비의 아내가 음식을 갖고 도착했다. 그녀를 들여보내려고 문을 약간 연 틈을 타서 안은 왼손으로 문을 잡고 오른손으로 투엔을 밀어넣었다. 사이공의 前 비밀 경찰국장은 하노이측 간첩의 구조로 헬리콥터가 대기하고 있던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파국으로 치닫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서있었던 세 인물

CIA 요원
프랭크 스넵은 베트남인 친구들과 정보원들의 탈출을 도운 후 4월 30일(아래)
사이공에서 헬기를 타고 미국 전함으로 탈출했다. 후에 그는 베트남전에서 자신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데 대해 분노하는 내용의 책을 썼다. 현재 TV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도움을 받지 못해 사망한 두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 한다. 옛 애인이었던 베트남 여인과 그녀가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아기가 그들이다.

월맹의 첩자
팜 수안 안은 타임誌 사이공 지국의 특파원이었다(아래)
. 많은 사람들이 CIA 요원으로 생각할 정도로 정보에 밝았던 그는 사실 월맹 육군의 정보 수집 담당 대령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였으며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미국인들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월맹군은 그를 재교육시키기 위해 하노이로 보냈다. 현재 그는 예비역 장군으로 사이공에서 살고 있다.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대통령 집무실에 홀로 앉아 TV 화면을 통해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지붕에서 헬기들이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장면을 지켜보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내 생애에서 가장 슬픈 날이었다”면서도 그렇게 많은 베트남인과 미국인들을 구출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에 협조한 많은 베트남인들이 그곳에 남겨졌다는 사실이 여전히 그를 괴롭힌다.

▶포화(砲火)
속으로

투엔 박사를 태운 헬리콥터는 해안에서 32km 떨어진 미국 해군 함대를 향해 남중국 해상으로 날아가는 헬리콥터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그 곳엔 미국이 월맹에 대해 잠시 무력을 거둔 것이지 결국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40대의 함정에 분산 수용된 함재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노이는 미국의 메시지를 무시하진 않았다. 오전에 탄손누트 공항에 대한 포격이 멈췄다. 마지막 탈출 경로가 열린 것 같았다. 문제는 그게 얼마 동안 지속될 것인가였다.

탈출한 월남군 장교들과 사병들이 탑승한 수십 대의 헬리콥터들이 혼잡한 갑판 위에서 착륙할 장소를 선점하기 위해 줄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핸콕호에 승선 중이던 대럴 브라우닝 해병 중위는 승무원들이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있도록 이미 착륙한 월남군의 헬리콥터를 바다로 밀어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CH46 헬리콥터의 조종사였던 브라우닝은 그 날 임무에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의 헬리콥터는 많은 승객을 태우기엔 너무 작았고 90분이 걸리는 사이공까지의 왕복 거리를 감당하기에는 비행거리도 모자랐다. 그러나 오후 4시쯤 그도 결국은 수라장 속으로 투입돼야 했다.

탈출은 극심한 혼란 때문에 이미 계획보다 3시간이나 지연되고 있었다. 50명을 수용하는 CH53 대형 치누크 헬리콥터는 이미 난민들로 꽉 찬 대사관 지붕에 착륙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브라우닝과 다른 20대의 CH46 헬리콥터 조종사들은 포위된 사이공으로 날아가 구출 작전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베트남 해안에 닿았을 때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마침 우기(雨期)
가 시작돼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 때문에 그는 지정 고도 6천5백 피트를 벗어나 2천 피트 이하로 날았다. 불안해진 그는 헬기가 표적이 되지 않도록 비행등을 껐다. 월맹군이 쏘아대는 소련제 대공 미사일도 두려웠지만 월남人들이 더 두려웠다.

미국이 포기한 것에 격분한 그들은 미군측에 총격을 가했다. 상공을 까맣게 메운 헬기들은 예외없이 지정 고도를 벗어나 비행하고 있었다. 브라우닝은 다른 헬기와 공중 충돌을 할까봐 겁이 났다.

귀환에 충분한 연료가 남아 있을지 걱정하며 헬기를 美 대사관 옥상에 착륙시킨 브라우닝은 눈 앞의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아래 공관 뜰에 적어도 1천 명이 운집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자문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까. 저들은 우리가 모두를 탈출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것인가.

그때 대사관 경비 해병들이 난민들의 몸을 수색해 발견된 무기는 조종석 창으로 브라우닝에게 건네주고는 그들을 헬기에 마구 밀어 넣었다. 정원 24명의 헬기에 36명을 태운(베트남人 체구가 작은 것을 감안해서)
그는 무사히 뜰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가 두 번째 구출 작전에 나섰을 때 사격이 시작됐다. 그의 헬기가 대사관 옥상에 다가가자 근처 성당의 첨탑에서 날아오르는 발연탄이 보였다. 갑자기 승무원 조장이 뒤로 넘어지면서 문에 부딪혔다. 그의 헬멧은 피범벅이 돼 있었다. 브라우닝은 그가 총에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는 헬기의 50 구경 기관총 속에 날아든 비둘기의 것이었다.

▶대사관 철수

대사관 6층의 CIA 지휘 본부. 누군가 코냑을 땄다. 월맹군이 오후 6시를 기해 대사관에서 몇 블록 떨어진 대통령궁을 포격할 것이라는 첩보가 오보로 판명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넷 무전기에서는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진 정원사·요리사·운전사 등 대사관에서 일하던 현지인들이 “살려주시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시오”라고 절규하는 소리가 빗발쳤다. 프랭크 스넵은 마이크를 들고 “걱정마시오. 당신들을 두고 가진 않겠소”라면서 그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사관 안에서는 CIA 요원들이 각종 문서를 파기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철수시 월남 정부 고위 관료들의 탑승권 역할을 할 수백 개의 신분증도 포함돼 있었다.

아찔하게도 스넵은 사이공 곳곳에서 살고 있는 70명 가량의 베트남人 통역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CIA와 일하던 통역들은 월맹군의 CIA 정보원 색출에 큰 도움을 줄 것이었다.

밖에서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복도를 가득 메운 채 서로 밀치며 옥상 쪽으로 더디게 나아가고 있었다. 7시 30분쯤 스넵도 행렬에 합류했다. 그는 옥상도 “아비규환을 연상케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헬기 엔진의 굉음, 멀리서 타오르는 불길, 밤하늘을 가르는 예광탄의 섬광, 특대형 비행모 때문에 거대한 곤충처럼 보이는 헬기 승무원들, 계속 밀려오는 군중의 행렬… 이 모든 것에 압도되어 그는 넋이 빠져 있었다.

헬기에 오른 그는 옆에 앉은 CIA 대원에게 소리쳤다. “지상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자 2차대전의 연합군 총공격이 시작될 때 공수부대 지휘관을 지낸 그는 “노르망디와 거의 비슷하군”하고 대꾸했다.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아직 대사관에 머물고 있던 마틴 대사는 분노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폐렴까지 앓아 얼굴은 창백했고 목소리도 갈라졌다. 그는 끝까지 대사관을 지킬 심산이었지만 키신저 국무장관은 그에게 철수를 명했다. 키신저는 나중에 자신의 글에서 마틴 대사가 19세기 말 수단의 하르툼에서 반군에게 포위돼 끝내 전사한 대영제국의 고든 총독과 같은 순교자가 될까봐 염려스러웠다고 술회했다.

키신저는 마틴에게 “미국은 우리 영웅들의 귀환을 바란다. 본국에는 귀관과 같은 영웅들이 별로 없다”고 전문을 보냈다. 마틴은 미국 정부의 수치심을 일깨워 최대한 많은 베트남人들을 구하려고 마음 먹었다. 잔류 미국인들을 모두 헬기에 태우라는 명령을 받은 마틴은 백악관의 스코크로프트에게 “월남人 사이에 자식을 둔 미국인들이 어떻게 자식을 버리고 갈 수 있는지, 대통령이 그들을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오”라는 뼈있는 전문(電文)
을 띄웠다.

마틴은 대사관에서 철수시켜야 할 잔류 미국인과 베트남人의 추정 수치를 계속 상향조정했다. 본국의 국무부 직원들은 그 수치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고 비꼬았다. 실제로 자정 무렵 약 1천 명(대부분이 월남人)
이 대사관의 안팎에서 장사진을 이뤘다.

대사관 수영장은 재뿐 아니라 소변으로 더러워졌다. 수영장 바닥엔 경비 해병들이 난민들에게서 압수한 무기들이 널려 있었다. 주차장에서는 약탈자들이 공관 리무진을 탈취해 이리저리 운전하고 다니면서 마치 광란의 범퍼 카 놀이라도 하듯이 서로 치고 받았다.

▶마지막 헬기 탈출

브라우닝은 몹시 피곤했지만 한편으로는 힘이 솟았다. 자정까지 그는 대사관까지 5차례 왕복했다. 그가 6번째 왕복 명령을 대기하고 있을 때 휴식 명령이 내려졌다. 헬기 한 대가 바다에 추락하자 함대 사령관은 조종사들이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염려했다.

대기실에서 브라우닝은 죽은 조종사가 자신의 부조종사였던 동료 밥 니스툴이란 것을 알게 됐다. 침상에 누운 브라우닝은 천장만 빤히 바라봤다. 그는 오전 3시 직전 잠을 깨야 했다. 그를 비롯한 헬기 조종사들은 사이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커피와 아드레날린으로 무장한 브라우닝이 동트기 전 막 육지 쪽으로 진입했을 때 무전기에서 ‘타이거! 타이거! 타이거!’라는 암호가 흘러나왔다. 마틴 대사가 대사관 옥상에서 구출됐다는 신호였다. 그는 마지막 미국인들이 모두 무사히 구출됐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명령대로 헬기 기수를 돌려 모함으로 향했다.

그러나 후위(後衛)
를 담당하던 해병 11명이 남아 있었다. 그날 아침 7시 50분쯤에야 무장 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사관 옥상에 착륙한 해병 헬기가 그들을 구조했다. 구조된 해병들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4백 명의 월남人에게 최루탄을 투하했다. 헬기 날개 때문에 최루 가스가 헬기 안으로 역류돼 들어왔다. 사이공을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미국인들은 매운 눈과 가뿐 숨을 참아야 했다.

핸콕호에 귀환한 브라우닝 중위는 탈진한 가운데서도 또렷이 깬 눈으로 자신이 구조한 월남 난민들을 바라봤다. “1천 명쯤 됐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어디로 갈지도 몰랐고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질서를 지켰고 우리에게 고마워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브라우닝과 그의 동료들은 갑판에 나와 간밤에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조종사를 위해 추모식을 치렀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의 마지막 희생자였다. 간밤의 공적으로 조종사들이 훈장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브라우닝도 대원 전원이 최고 훈장인 공군 수훈 십자장에 추천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스러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브라우닝 중위는 그보다 낮은 등급의 공군 훈장을 받았다. 현재 대령인 브라우닝은 버지니아州 콴티코의 해병대 지휘 참모 대학에서 근무하고 있다.

▶해병대 헬기 조종사

대럴 브라우닝 중위는 사이공 최후의 날 이전에는 전투에 참가해 본 적이 없다. 그는 그날 CH46 헬기를 조종해 美 전함 핸콕號(아래)
갑판에서 출격, 5회의 구조 임무를 수행했다. 지상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한 그는 헬기의 정원을 무시한 채 탈출자들을 가득 태워 실어날랐다. 현재 브라우닝은 버지니아州 콴티코에서 대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재교육과 회한

마지막 헬기가 대사관 옥상을 떠난 지 약 1시간 후 월맹군의 중국제 탱크가 대통령궁 문으로 난입했다. 모두 철수해버린 타임誌 지국 사무실을 나온 안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월남 친구들이 걱정이었다. 콘티넨털 호텔 옆을 지나던 그는 전에 알던 한 창녀를 하마터면 못알아볼 뻔했다. 그녀는 언제나 입고 있던 화려한 꽃무늬 미니스커트 대신 시골 아낙들이 입는 검은 파자마 차림이었다.

짧은 손톱은 매니큐어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립스틱도 지운 채였다. 그녀는 월맹군들에 의해 죽는 것보다 강제로 상이군인과 결혼하는 것이 더 두렵다고 말했다.

하노이에서 온 정복자들은 안을 경계하면서도 받아주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방인들과 일해 온 그가 사상적으로 오염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하노이에서 재교육을 받도록 명령했다.

안은 마르크시즘 강의가 대부분이던 재교육이 지루하긴 했지만 별로 힘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안은 1990년까지 하노이의 전략첩보국에서 근무한 후 장군으로 승진하면서 예편했다. 그 후 그의 가족은 사이공에 돌아왔고 그의 아들은 모스크바大에 유학했다.

현재 그의 아들은 리처드 닉슨 前 대통령의 모교인 듀크大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다.

하와이에서 며칠간 휴가를 보낸 후 스넵은 CIA에 의해 방콕에 파견돼 보트 피플을 포함한 베트남 난민들의 신문 임무를 맡았다. 1976년 CIA를 떠난 그는 사이공 함락에 관한 책(Decent Interval)
을 집필했다.

그는 책에서 자신의 상관들이 철수 작전에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비판해 CIA 노병들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전쟁 수훈에 대해서 스넵을 높이 평가한 톰 폴가 당시 사이공 지국장도 그를 “새빨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웠다)
. 언론의 자유 침해 시비로 세인의 관심을 모았던 1978년 소송에서 스넵은 기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깬 혐의로 CIA에 의해 고소당해 책의 판매 수익을 환수당했다.

현재 신디케이트 TV쇼 ‘엑스트라’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스넵은 1991년 사이공을 다시 밟았다. 마이 리와 함께 지내던 초라한 집을 지나면서 그는 문득 아들이 살았다면 지금 18세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스위크=Evan Thomas 워싱턴 지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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