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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나는 이렇게 읽었다] 민주주의 길들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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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내가 브라질의 지방 도시 포르투 알레그레(Porto Alegre)를 기억하는 것은 다분히 반발 심리의 소산이다. 스위스 다보스에서는 세계화의 만수 무강을 비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열리는데, 여기서는 반세계화를 외치는 세계사회포럼(WSF)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계화를 말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신념 아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안을 찾자는 것이다. 이 '대안 세계화' 운동의 센터가 포르투 알레그레이다.

마리옹 그레와 이브 생토메 공저인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박종철출판사, 2005)은 이 포르투 알레그레 주민들이 일궈낸 자치 경험을 분석하고 설명한 책이다. 여기 '새로운 민주주의'가 원저에는 '다른 민주주의'로 나와 있는데, 새롭든 다르든 현존 민주주의에 불만이라는(!) 뜻이므로 일단 불온 서적으로 찍힐(?) 위험이 있다. 대의민주주의 200여 년의 성적에 신물이 솟는지라 직접 민주주의에 향수가 생길 만도 하다. 그렇다고 사금파리 조각에 이름을 적어 사람을 쫓아버리는 '도편(陶片) 추방' 따위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핵심은 '참여'이다. 그 참여는 입법.행정.사법의 전통적인 3권 분립에 제4의 '시민 권력'을 추가함으로써 대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를 결합한 것이다. 주민의 참여 단계로는 동네→구역→시가 있으며, 이에 맞추어 총회→포럼→평의회 등 '참여 피라미드'를 마련해놓고 있다. 잘났든 못났든, 배웠든 못 배웠든, 늙었든 젊었든 신청만 하면 이 피라미드를 통해 시정(市政)에 참여하고 투표한다.

참여 민주주의의 꽃은 참여 예산제도이다. 참여 예산은 다수결 논리→재분배 논리→기술 논리로 짜여진다. 주민은 다수결로 시정 사업에 우선 순위를 정하고 4, 3, 2, 1로 점수를 준다. 인구 분포와 시설 상태를 감안한 재분배 논리로 등급을 나누어 역시 점수를 매긴다. 그리고 각 등급에 일정하게 조정된 계수를 부가한다. 예컨대 갑 지구의 도로 포장 사업에 주민들은 둘째 등급 3점을 주었으나, 인구 밀도가 낮아 셋째 등급 2점과 부족 정도가 심해 첫째 등급 4점을 받았다고 치자. 또 해당 항목의 계수가 각기 5, 4, 3이라면 이 지구의 점수는 (3×5)+(2×4)+(4×3)=35점이 된다. 같은 방식의 채점으로 을 지구는 20점이 나왔을 때, 사업 추진에 기술적 문제가 없다면 시 정부의 도로 포장 예산은 갑 지구에 우선 배정하거나 을 지구와 35ː20으로 배분한다.

얼핏 보면 시정인지 소꿉장난인지 분간이 어렵다. 수십 수백의 사업에 수천, 수만의 주민이 모여 이처럼 우선 순위를 매기고, 계수를 정하고, 예산을 짜다 보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그러나 참여의 비효율은 비참여의 효율에 비길 바가 아닐 만큼 교육적이란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면"(46쪽), 공식 체계에서 국외자이거나 주변인이던 "피지배 사회 집단이…참여 체계의 내부자가 된다"(130쪽). 그리고 "그들의 정치는 자본주의와 단절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혁명적 노선보다는 급진적인 사민주의 노선을 따른 것"(117쪽)이라니, 독자들께서 불온 걱정일랑 당분간 붙들어매도 좋을 듯하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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