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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3막 시작할 때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 보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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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호 07면

스웨덴 북부 아비스코와 헤마반을 잇는 쿵스레덴은 유럽에 남은 마지막 야생 지역으로 불린다. 빨간색 X자 표지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노란 화살표처럼 쿵스레덴의 이정표이자 상징이다. [김효선씨 제공]

“기업체에서 퇴직 예정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보면 ‘직장 떠나고 난 뒤 어떻게 돈을 모을까’에 집중돼 있어요. 자격증 취득, 부동산ㆍ증권 투자, 소자본 창업 등이죠.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가정과 직장을 위해 뼈빠지게 일했던 분들이에요. 그런데 은퇴해서도 처자식 못 먹여 살리면 바보 취급받습니다. 꿈을 포기하며 살았던 이분들이 잠깐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여행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쿵스레덴 440km 첫 종주한 ‘아줌마 한비야’ 김효선씨

김효선(55)씨의 말은 거침없었다. 키 1m60㎝가 안 돼보이는 평범한 아줌마. 하지만 그에게서는 비범한 포스가 느껴졌다. 김씨는 도보여행 전문가 겸 작가다. 2006년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카미노 데 산티아고) 900㎞를 두 달 동안 걸은 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유럽을 만나다』(바람구두)를 썼다. 그 후 세 차례 더 산티아고를 갔고, 도보ㆍ철도여행 책을 세 권 더 썼다. 그는 언어와 체력을 걱정하며 장거리 도보여행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무언의 격려로 등을 떠밀었다. ‘아줌마도 가는데 우리라고 못 갈쏘냐’라며 사람들이 산티아고에 도전장을 냈다. 지금은 스페인 대학에서 ‘왜 갑자기 산티아고에 한국 사람이 몰리나’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 정도가 됐다.

그는 결심을 하면 실행에 옮긴다. 대기업 교육 담당자에게 연락해 퇴직 예정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겠다고 해 승낙을 받았다.

“한세상 살다 가는 건데 인생 3막을 시작하면서 한 번쯤 모든 걸 내려놓고, 한 달 만이라도 여러분만의 여행을 해 보세요. 그러면 욕심을 버리고 뭐든지 할 수 있는 용기와 에너지를 얻을 것입니다라고 제 경험담을 얘기했어요.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강의가 끝나고도 가지 않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분이 참 많았어요. 그렇게 해서 산티아고를 갔다 온 분들은 한결같이 인생관이 바뀌고 살아갈 용기를 얻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쿵스레덴에서 만난 스웨덴 여행자들과 기념 촬영을 한 김효선씨(왼쪽).

김씨가 이번에는 스웨덴 쿵스레덴을 다녀왔다. 스웨덴 북부에 ‘왕의 길’이라고 알려진 440㎞ 도보여행길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라고 한다. 2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김씨를 지난 1일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에서 만났다.

“자작나무로 물 데워 목욕하면 선녀 기분”
-쿵스레덴이라는 곳은 생소한데요. 어떤 곳인가요.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아름다운 산과 호수를 만나며 걷는 길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복합문화유산에 등재돼 있죠. 유럽에서는 산티아고 갔다 온 사람들이 다음 코스로 찾는 곳입니다.”

-어떤 게 가장 인상적이었나요.
“산을 넘고 들을 가로지르는 트레킹 코스입니다. 돌이 많은 곳이나 개울에는 자작나무로 침목을 깔아 놔 운치를 더해 줍니다. 20.5㎏ 배낭을 메고 다녔고 잠은 주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죠. 사람은 무섭지 않은데 곰이나 엘크 같은 야생동물이 나올까 좀 겁났습니다. 그런데 동물들이 사람 냄새 맡고 먼저 피한다고 하더군요. 전망 좋은 곳에 텐트를 치면 7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습니다. 스웨덴여행자협회에서 관리하는 오두막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즐거웠던 일과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오두막에 들어가면 페치카가 있어서 나무를 때 난방을 하고 물을 끓여 목욕도 할 수 있어요. 자일리톨 껌의 원료인 자작나무를 때면 특유의 향기가 납니다. 불꽃 색깔도 환상적이지요. 청정 호수 물을 자작나무로 데워 목욕을 하면 선녀가 부럽지 않죠. 소수 부족인 사미족이 만들어 준 순록 불고기도 정말 맛있었어요. 힘든 건 물을 데울 수 없어 찬물로 샤워했을 때 정도죠.”

-남자 두 분이 함께 출발했다가 중도에 그만뒀다면서요.
“한 분은 에베레스트와 아프리카 오지 등 야생 기행을 많이 한 친구였어요. 힘들면 도움을 좀 받겠다 싶었는데, 이 양반이 한 시간에 8.5㎞를 걷는 겁니다. 체력이 좋은 유럽 친구들도 3㎞ 이상 속도를 내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대회에 출전한 것처럼 언제나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요. 그러고는 키 큰 유럽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빠르다고 은근히 자랑하더군요. 그러다가 일정의 절반 정도 와서는 ‘내가 할 만큼 했으니 돌아가겠다’고 해요. 동행한 남자 한 분도 많이 힘들어하셨는데 핑계 김에 함께 떠났죠.”

-나머지 길은 혼자 걸으셨네요.
“그때부터 제대로 된 도보여행을 할 수 있었어요.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 곳에 텐트를 쳤고, 야생화가 만발한 곳을 따라 걸었죠. 스웨덴의 베스트셀러 작가도 만났고, 스웨덴 개 썰매 챔피언과도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도보여행이란 게 순위나 기록을 재는 게 아니잖아요. 힘들면 쉬었다 가고, 마음맞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얘기 나누고, 맛있는 것 나눠 먹고 하는 게 묘미거든요.”

“북한산 갔다 올 체력이면 문제없어요”
김씨는 걷는 걸 좋아하고 길에 관심이 많았다. 올레길ㆍ둘레길이 생기기 전에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트레킹 코스를 소개하는 자원봉사를 했다.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하다 실버세대를 위한 교육 아이템을 갖고 창업을 했다. 사업은 실패했지만 여행을 위해 조금씩 모아 둔 돈이 있었다. ‘남들과 같이 하려고 했는데 안 된다면 나만이라도 해 보자’ 싶어서 산티아고행을 결심했다. 장성한 두 딸은 미국에 있어서 몸도 마음도 홀가분했다.

산티아고 여행기가 꽤 팔리면서 그는 하루 수십 통의 메일을 받는 도보여행 전문가가 됐다. “북한산ㆍ도봉산 올라갈 수 있는 체력이면 되고요. 언어는 보디랭귀지로 다 통한답니다. 극기훈련이 아니니까 속도와 거리를 조절해 걸으면 됩니다. 걷다 보면 명상에 빠지게 되고, 생각이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 나쁜 감정의 찌꺼기는 걸러지고 신선한 의욕과 아이디어가 솟아나게 되죠.” 그는 질문에 꼬박꼬박 답을 해 줬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자료도 나눴다. 쿵스레덴 다녀온 얘기도 곧 책으로 낼 예정이다.

-쿵스레덴 일정 중에 노르웨이 총기 테러사건이 터졌던데요.
“스웨덴·노르웨이 국경 쪽을 걷고 있는데 사건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근데 그쪽 사람들 참 서늘해요. 크게 동요하지도 않고 분노를 폭발시키지도 않아요. 사실 북유럽 쪽은 무슬림 이민자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거든요. 오히려 우리나라가 다문화시대를 맞을 준비가 덜 된 것 같습니다. 중장년들이 해외에 나가 다양한 인종ㆍ국적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련되게 문화를 주고받는 모
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유럽 쪽은 환경 보전에도 크게 신경 쓴다면서요.
“쿵스레덴은 바다처럼 넓은 호수들이 많이 있어요. 물이 그렇게 풍성한데도 오두막에는 물 버리는 곳이 따로 있어요. 씻고 닦은 물을 모아서 버리지 않으면 벌금을 뭅니다. 장거리 도보여행을 하다 보면 최소한의 것만 챙기는 습관이 생기게 돼요. ‘이게 정말 내게 필요한가’ 물어보면 세상을 더 단순하고 즐겁게 살 수 있지요.”

-우리나라도 걷기 바람이 불고 있는데 부작용도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걷기 문화가 이제 시작이니 문제가 왜 없겠습니까. 중요한 건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남에 대한 배려, 자연에 대한 배려지요. 몇 년 전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한 뒤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는데 병명은 ‘낙담’이었어요. 나만, 내 동아리만 챙기려는 모습에 맥이 탁 풀렸습니다. 500명이 참석한 행사에 생수 1000병을 준비했는데 300명쯤 지나자 다 떨어졌어요. 자기 식구ㆍ동아리 사람들 몫까지 다 챙겨 가 버린 거죠. 어떤 대학교수가 길가 밭에서 익지도 않은 호박을 따기에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그냥, 재미로요’ 이러더라고요.”

인터뷰를 마친 뒤 올림픽공원에서 잠실역까지 걸으면서 김씨는 ‘송파 소리길’ 얘기를 했다. 자신이 사는 송파구의 석촌호수~성내천~탄천~한강을 잇는 걷기 코스를 만들자고 송파구청에 제안을 했고, 그게 결실을 봤다는 것이다. 소리길은 밤에, 서울의 야경을 보면서 가족이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걷는 명소가 됐다.

그는 다음 달 짐을 꾸려 또 산티아고로 떠난다. 이번에는 중년 부부 몇 쌍의 안내자로 나섰다. 그의 길사랑은 종착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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