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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종이 될 수 없다” … 이상룡 일가도 집단 망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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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호 26면

이상룡의 고택인 안동 임청각. 이상룡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청각을 팔면 고성 이씨 문중에서 되사기를 반복했던 유서 깊은 종가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⑦ 안동 유림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911년 1월 5일 경상도 안동.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은 새벽에 일어나 가묘(家廟)에 절했다. 그는 망명 일기인 서사록(西徙錄)에서 “행장을 수습하여 호연히 문을 나서니, 여러 일족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며 전송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미 만 쉰둘의 나이였다. 그의 집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은 고성 이씨 12세손으로서 영산(靈山)현감을 지낸 이명(李<6D3A>)이 지었는데, 이상룡 망명 후 일제가 독립운동의 정기를 끊는다며 그 앞을 철길로 갈라놓았다. 그만큼 그의 망명이 영남 유림에 준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는 서사록에서 “작년(1910) 가을에 이르러 나라 일이 마침내 그릇되었다…. 아직 결행하지 못한 것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일 뿐이다”라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의했다. 안동 하회마을과 상주를 거쳐 1월 12일 새벽 2시 추풍령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탔다. 9세손은 학계 일각에서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고려 말의 문신 행촌(杏村) 이암(李<5D52>:1297~1364)이다. 이런 집안 전통 때문인지 이상룡도 역사에 밝았다.

이상룡. 이상룡은 내각책임제 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총리)을 역임한 저명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서사록에서 “하물며 만주는 우리 단군 성조(聖祖)의 옛 터이며, 항도천(恒道川:횡도촌)은 고구려의 국내성에서 가까운 땅임에랴? 요동은 또한 기씨(箕氏:기자)가 봉해진 땅으로서 한사군(漢四郡)과 이부(二府)의 역사가 분명하다…. 어찌 이역(異域)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훗날 한사군 지역이 한강 이북이라고 왜곡하는데, 이상룡은 마치 그런 사실을 예견했다는 듯이 한사군을 만주 요동에 있었다고 지적했고, 우리 영토라고 바라보았다. 이상룡의 망명도 조직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아들 이준형(李濬衡:1875~1942년 자결)이 쓴 이상룡의 일대기인 선부군유사(先父君遺事)는 “(1910년) 11월에 황만영·주진수가 경성으로부터 와서 양기탁·이동녕의 뜻을 전달하면서 만주의 일을 매우 자세히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만주로 건너갈 계획을 결심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회영·이동녕 등이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로 결정한 만주 횡도촌에 합류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인 허은 여사는 구술 자서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시영씨 댁은 이 참판 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이시영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허은 여사는 13도 의병연합부대의 군사장이었다가 1908년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한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의 집안 손녀였다. 집단 망명의 선이 안동까지 닿았다는 뜻이다. 추풍령에서 기차를 탄 이상룡은 12일 오후 8시12분 서울에 도착했으니 서울까지 열여덟 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서사록은 1월 13일 “아침에 우강(雩岡) 양기탁(梁起鐸)이 내방했는데, 초면에도 정성스럽고 극진한 모양이 벗이나 다름없다”고 묘사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양기탁과 이상룡은 초면이지만 잘 아는 사이였다. 이상룡은 1909년 2월 안동경찰서에 구인돼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신문을 받다가 석방된 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었다. 선부군유사는 “몇 달이 못 돼 지회에 가입한 사람이 거의 수천 명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협회가 1909년 일진회와 제휴하는 등 친일 성격을 띠어가면서 안동지회와 충돌했다. 이준형의 선부군유사는 “이때(1909년) 적신(賊臣)의 무리들이 사법권을 일본 정부에 양도했는데, 드디어 경성의 대한협회에 편지를 보내 그 침묵하고 있는 것을 꾸짖고, 또 경성의 협회가 적당(賊黨)과 연합한 것이라 하여 위원을 파견해 논쟁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상룡은 서사록에서 양기탁에게 “경회(京會:대한협회 본회)는 경회 자신일 뿐이었습니다. 그 득실이 지방의 지회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양기탁이 “예, 예”하며 아무 말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상룡은 신의주에 도착해 압록강의 상황을 보고 “일인이 장차 강 위에 무지개다리를 놓으려고 돌기둥을 이미 벌려 세웠다”며 “만약 이 다리가 한번 낙성되면, 연경(燕京:북경)이며 여순(旅順)이며 하얼빈 등지가 모두 하룻길이 될 것이다. (일본) 국력의 부강함이 두려울 뿐 아니라 그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큰 야욕이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 만하다”고 말하고 있다. 뛰어난 역사가답게 이후 일본의 만주 및 중국 본토 침략을 정확히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룡 자신은 이런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상룡은 “어떤 경우에도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택한다(熊魚取舍)’는 것은 예로부터 우리 유가(儒家)에서 날마다 외다시피 해온 말이다”고 말했다. 맹자 ‘고자(告子)’에서 “물고기(魚)와 곰 발바닥(熊掌)을 모두 먹고 싶지만 둘 다 가질 수 없을 때는 곰 발바닥을 갖는다”고 말하고, “생명과 의리를 모두 취할 수 없다면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할 것이다”고 덧붙인 것처럼 선비는 실리 대신에 의를 택한다는 뜻이다.

신의주에 도착한 이상룡은 1월 25일 “저녁 먹은 후에 등불을 들고 (신의주) 정거장에서 기다렸다. 밤든 지 오래되자 과연 일행이 일제히 도착하는 것이 보인다”고 적고 있다. 맏아들 준형이 맨 앞에, 동생 이봉희(李鳳羲) 부자가 맨 뒤에 서서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면서 신의주까지 온 것이다. 이상룡 일가도 이회영 일가처럼 집단 망명이었다. 이상룡이 사라진 후 경찰서에서 여러 차례 조사했고 준형은 경찰서까지 끌려가 조사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가는 1월 27일 발거(跋車:썰매 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데, 이상룡은 시상이 떠오른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삭풍이/차갑게 내 살을 도려내네/내 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창자 끊어지는데 어찌 슬프지 않으랴(朔風利於劒/<51D3><51D3>削我肌/肌削猶堪忍/腸割寧不悲)” 내 살 도려지는 것보다 나라 잃은 슬픔에 더 애간장이 탄다는 시다. 이상룡은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호연히 나는 가리라(此頭寧可斫/此膝不可奴/…/爲誰欲遲留/浩然我去矣)”라며 비장한 결의로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현에 도착해 이윤수의 객점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1월 29일에 마차 두 대를 사서 횡도촌으로 떠났다. 수레 안에 담요를 깔고 온몸에 이불을 둘러야 할 정도로 추웠는데 이상룡은 “어린 것들이 연일 굶다 못해 병이 날 지경이었다. 좁쌀 두어 되를 사고 솥을 빌려 밥을 지어 먹이니 그 괴로운 상황을 알 만하다”고 적고 있다.

서사록은 2월 7일자에 “냇물을 따라 가다가 10여 리쯤에서 산기슭이 트이고 시야가 넓어진다. 멀리 숲 사이로 지붕 모서리가 들쭉날쭉 보이니 그곳이 항도천(恒道川:횡도촌)임을 알겠다”고 적고 있다. 국외독립운동 근거지 횡도촌에 비로소 도착한 것이다.

횡도촌에는 먼저 망명한 정원하·이건승·홍승헌 같은 강화학파와 이회영 일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룡은 도착 당일 “오후에 김비서장(金賁西丈)이 계신 곳을 찾아갔다”고 적고 있는데, 그가 먼저 망명한 처남인 백하 김대락(金大洛:1845~1914)이었다. 김대락은 만 예순다섯의 노구로 이상룡보다 이른 음력 12월 24일 고향 안동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넜다. 김대락은 가족은 물론 식민의 땅에서 후예를 낳을 수 없다는 뜻에서 만삭의 손자며느리도 동행시켰다.

이상룡이 “이 노인(김대락)이 일전에 증손자를 본 경사가 있어 한편 위로하고 한편 하례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망명길에서 낳은 아이를 식민지 땅이 아닌 중국에서 낳아서 통쾌하다는 뜻의 쾌당(快唐)으로 짓고, 둘째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땅에서 태어났다는 뜻의 기몽(麒夢)으로 지었다. 안동의 평해 황씨 황호(黃濩:1850~1932) 일문도 집단 망명에 가담했다.

김대락은 횡도촌에서 학교를 열어 후학들을 길렀는데, 이상룡 일가는 학교 한 칸을 빌려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룡은 서사록 2월 9일자에 “임석호·조재기가 나중에 도착했는데, 그 편에 양기탁이 붙잡혀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동토의 조선에서는 105인 사건이란 광풍이 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