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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욕망 거부하고 삶을 응시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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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호 10면

대학 다닐 적 재미 삼아 했던 엉터리 심리테스트가 생각난다. ‘커피·벽·바다’라는 세 단어에서 각각 떠오르는 즉각적인 느낌이 각각 ‘섹스·죽음·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준다고 전제하고, 친구들끼리 그걸 묻고 답하면서 깔깔거렸던 기억이다. 예컨대 ‘벽’이란 말에서 ‘답답하다’는 느낌을 갖는 사람과 ‘기대고 싶다’고 답하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다’는 삶, 인생이란 의미였다. 이렇게 바다는 종종 상징으로 다가온다. 일제가 중국 침략을 한 다음 해에 나온 대중가요인 남인수의 ‘감격시대’의 ‘희망봉이 멀지 않다 행운의 뱃길아’란 구절이 범상치 않게 해석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1> 바다에 투영된 세상과 인생

대중가요에서도 바다는 종종 상징으로 등장한다. 그중 빈번하게 쓰이는 의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생’의 상징으로서 바다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 라라라 (반복) / 작은 배로는 작은 배로는 /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조동진<사진>의 ‘작은 배’, 1974, 고은 작사, 조동진 작곡)

나는 여태껏 이토록 배짱 좋고 과감한 가사를 본 적이 없다. 이 노래의 가사는 딱 세 구절, ‘배가 있었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뿐이다. 이것을 반복하면서 ‘작은’과 ‘멀리’를 덧붙이고, 그 다음 구절에서는 ‘아주 작은’ ‘아주 멀리’를 덧붙여 분위기를 점층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시인 고은의 가사다. 조동진은 이런 가사의 구조를 잘 해석하여 정확한 호흡으로 조곤조곤 선율로 풀어 갔고, 통통 튀는 듯한 리듬의 기타 한 대의 반주에 작은 종소리를 딸랑딸랑 넣는 미니멀한 음악으로 처리했다.

여기에서 ‘작은 배’는 자신이고 ‘바다’는 세상 혹은 인생이다. 이제 막 본격적인 성인의 길로 들어서려는 청년들에게 세상과 인생은 두려움 그 자체다. 이 험한 세상, 거친 인생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자신은 작고 힘도 없으니, 작은 풍랑만 만나도 좌초해 버릴 것 같다. 그래서 멀리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다.

이런 두려움이 없는 20대가 어디 있으랴. 두려워도 그저 바다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다칠까 봐, 몸조심한다고, 멈칫거릴 수 없다. 깨질 때 깨지더라도 가는 게 옳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를 외쳤던 김민기와 양희은은, 이번에도 호흡을 맞춰 바다로 나아가겠단다.
“어두운 밤바다에 바람이 불면 / 저 멀리 한바다에 불빛 아물거린다 / 아무도 없어라 텅 빈 이 바닷가 / 물결은 사납게 출렁거리는데 /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 / (하략)”(양희은의 ‘바다’, 1972, 김민기 작사·작곡)

밤바다 위에서 멀리 깜빡이는 불빛이 등대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사나운 물결이 이는 바다에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내 작은 조각배’를 띄워 보겠노라 선언한다. 게다가 호기롭게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고 노래한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에서도 등장하는, 더운 가슴에 거친 바람 맞으며 들판을 달려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다.

이 시기에는 이렇게 두려움을 이기고 나아가겠다는 노래가 꽤 있었다. 그것도 여자 가수의 노래에 이런 의지적인 형상이 등장하는 시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파도여 슬퍼 말아라’로 시작하는 김추자의 ‘무인도’ 역시 드높은 파도밖에 없는 곳에서 혼자 고독하게 버티고 서 있는 무인도로 자신을 비유했다. 참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울 터인데도 그것을 ‘찬란한 고독’이라 부르고 ‘드높아라 파도여’라고 소리친다. 정말 이 시대는, 엄청 센 여자들을 대중이 기꺼이 받아주던, 매우 드문 시대였다.
거친 세상과 인생을 조금 관조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는 모습도 드러난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양희은의 ‘세노야’, 1971, 고은 작사, 김광희 작곡)

슬픈 일, 기쁜 일, 고통과 즐거움이 있는 인생이라는 바다에 노를 저어가는 주인공은, 기쁜 일은 산과 바다에, 슬픈 일은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껴안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이 정도면 거의 득도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로 시작하는 최희준의 ‘하숙생’보다 한 수 위다.
어찌 스무 살짜리들이 이런 노래를 작곡하고 부를 수 있었을까. 아마 포크가 가지고 있던 독특한 ‘관조’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부모세대들처럼 세상의 욕망에 몸을 맡겨 떠다니기를 거부하고, 한 발짝 떨어져 삶과 세상을 조용히 응시하고 사고하는 태도, 불교식으로 말하면 관(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포크의 바람이 조금 잦아든 1980년대 꿋꿋하게 작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정태춘 역시 이러한 태도로 바다를 노래한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 /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정태춘의 ‘떠나가는 배’, 1984, 정태춘 작사·작곡)
겨울비에 돛은 젖어 있는데 배는 거친 바다 위를 헤매고 있다. 그것은 80년대 초 먹고살 길조차 막막했던 정태춘 자신의 모습이었을 수 있다. 이렇게 물 먹은 몸으로 찬바람을 견디며 가노라면, 언젠가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만나기는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지금 우리 자신에게도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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