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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쿤스의 ‘반짝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중앙선데이

입력 2011.08.07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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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호 04면

1『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프로네시스, 2007) 2.『키치, 어떻게 이해할까?』(미술문화, 2007)
유명 작가 제프 쿤스가 아트뉴스(Artnews)가 선정한 ‘105년 후에도 남을 작가 명단’에 들지 못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그는 미술사에는 남는다. 미술사를 잘 읽어 보라. 볼테라는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에 누드로 그린 인물들에 옷을 입히는 작업을 해서 ‘팬티 화가’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당대의 인기 작가였던 부게로는 당대의 비인기 작가 마네의 ‘올랭피아’의 선구적 특징을 비교 설명하기 위해 이름이 거론된다. 문제는 ‘어떻게 남을 것인가’이다. 쿤스가 현대미술의 한 장을 연 위대한 작가로 남을지, 한때의 인기 작가로 남을지는 아직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이름은 키치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 매혹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들의 이름, 키치 말이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21>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키치, 어떻게 이해할까?』 『키치로 현대미술론을 횡단하기』

키치의 고전적인 예는 이발소 그림이다. 편하고 어디서 본 듯하고 상식적인 그림들이다. 명작의 원리가 아닌 기법을, 심오한 내용 대신 분위기를 모방한 것들이다. 짝퉁이 명품의 유명세에 기대듯 원작의 유명세에 기댄다. 키치는 전문적인 감식안과 미감의 훈련 없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통속예술과 혈연 관계에 있다. 통속예술이 통속적이고 한때의 오락거리 노릇을 하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통속예술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내용은 통속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겉으로는 고급 예술인 척하는 키치(키치아트)다.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프로네시스, 2007)의 저자 조중걸은 키치를 단호하게 단죄한다. “키치는 고급 예술을 위장하는 비천한 예술이다.” 그것은 품격과 고귀함 대신 상투적인 고급스러움으로 무장한 예술이다. 좋은 예술은 “인간과 삶과 우주에 대해 진실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 준다. 반면 키치는 달콤한 감상에 빠져 현실의 부조리함에 눈을 감는 “예술이라는 이름의 아편”이다. 키치는 고급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쓰레기를 황금으로 덧칠”함으로써 정상적인 불행을 병적인 행복으로 바꾼다.

4 신세계 백화점 본점 트리니티 가든에 선 제프 쿤스와 그의 작품 세이크리드 하트’. 사진 신세계 백화점 제공
삶에 대한 건강한 비판과 극복의지가 아니라 죽음·퇴폐·허무에 대한 나른한 쾌락이 동반된다. 『키치, 어떻게 이해할까?』(미술문화, 2007)를 쓴 가브리엘레 툴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키치적 취향이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들어온 것을 키치아트라고 규정한다. 키치아트는 “성공한 팝아트의 변종”이며 벼랑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예컨대 제프 쿤스는 앤디 워홀이 멈춘 곳에서 출발해 거의 벼랑 끝까지 간다. 워홀이 상품사회의 미학을 발견했다면 쿤스는 상품 자체를 미학화한다.

『키치로 현대미술론을 횡단하기』(경성대학교출판부, 2011)의 저자 이영일은 쿤스의 실제 형광등 위에 실제 진공청소기를 붙인 작품 등은 단순한 상품을 “작품이라는 아우라를 씌운 고급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풍선 강아지, 풍선 꽃, 가짜 다이아몬드 반지 등과 같은 쿤스의 또 다른 작품들은 모두 상품 포장지처럼 매끈하고 반짝거리는 표면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쾌적하고 유쾌하며 즐겁다. 또한 이 작품들의 2~4m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는 쿤스가 위대함을 거대함으로 정량적으로 대체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용적 위대함은 없지만 크기의 거대함은 위대한 작품들의 비일상성과 숭고함을 연상시키고 그것들을 얕잡아 볼 수 없게 만든다.

워홀은 50년 전에 등장했다. 그때 그의 어법은 신선했고 모두 생산적인 골머리를 앓았다. 좋은 예술작품은 오래 두고두고 보게 만든다. 최초의 불편함과 낯섦이 연속적인 사유와 감상을 유발한다. 쿤스의 작품 앞에서는 얼마나 머무를까? “오! 제프 쿤스네. 근사하군.” 관람자들도 키치적 감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관람객들은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기대 자신의 감수성을 여는 것이 아니라 쿤스라는 작가의 유명세에 기댄다. “엄청 유명한 작가야. 경매에서 엄청 비싸게 팔린다던데. 치치올리나라는 포르노배우 출신 국회의원하고 결혼도 했었잖아….” 작품 감상이 아니라 흥미로운 스토리로 가득 찬 ‘제프 쿤스’라는 유명 브랜드에 관한 촌평이 이어진다. 그러나 어쨌거나 대부분의 관람객은 가벼운 기분으로 돌아설 것이다.

세 명의 저자 모두 키치가 우리 시대의 필연적 존재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조중걸과 툴러는 키치의 존재 이유를 바로 우리가 사는 나쁜 사회라고 지적한다. 키치는 후기 자본주의의 심화된 소외현상과 예술 엘리트주의의 반발의 일환이다. 키치는 위안을 찾는 대중의 마음에 쏙 들어간다. “사는 것도 피곤한데, 예술작품마저 피곤한 것은 싫어.” 이것이 키치아트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실제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키치에 분노했었지만 이제는 이 저속한 취향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젊은 세대들은 더욱더 그렇다. 툴러는 “이것이 어느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이것이 키치의 성공사이다”고 쓴다. 툴러의 책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쓴 간단한 개론서이며, 조중걸의 책은 키치에 대한 도덕적인 인문학자의 분노를 노골적으로 보여 주며, 이영일의 책은 박사 논문에 기초한 진지한 글이다.

키치를 둘러싼 논문들이 국내외에서 한 해에도 여러 편 쏟아져 나오고 있다. 논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제프 쿤스는 간단하다, 명백한 키치(아트)이니까. 키치와 예술의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다양한 작품의 존재가 중요한 문제다. 이해하기 쉬운 대중적 성격도 문제는 아니다. 더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고 큰 감동을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여전히 물어야 할 것은 예술의 위치다.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인 폴 블룸의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는 중요한 힌트를 준다.

그는 예술을 감상하고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인류가 창의성을 존중할 줄 알기 때문이며, 이것은 진화적 적응 과정의 일부라고 말한다. 창조적일수록(새로운 무기, 새로운 농사법 등)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으며 이 체험은 창의성의 숭상이라는 본능을 유전시킨다. 키치(아트)에 대한 질문도 여기서 시작해 본다. 그 작품이 당대의 위안을 넘어 인류에게 창조적인 DNA를 유전시켜 줄 수 있는가? 예술작품 앞에서 작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비즈니스인가, 아니면 인류의 휴머니즘적인 존재 방식의 탐구인가? 가격 기록의 경신이 아니라 이것이 제프 쿤스가 넘어야 할 진정한 허들이다.

이진숙씨는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 작품에서 느낀 감동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미술의 빅뱅』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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