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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투쟁보다 은퇴 후 설계 돕는 日 세이코엡손 노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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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호 22면

일본 세이코엡손의 시미즈 마나부 노조 부위원장이 6월 말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미래에셋 제공]

지난 6월 말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가 주최한 국제세미나에 이색적인(?) 강사가 초빙되었다. 일본 굴지의 제조업체인 세이코엡손의 시미즈 마나부 노조 부위원장이 주인공이다. ‘근로자 은퇴교육과 기업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 노조 간부가 강사로 초빙됐으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발표 제목은 ‘세이코엡손 노조의 라이프 서포트(Life Support) 활동’.

강창희의 100세 시대 자산관리

조합원이 1만2000명 정도인 이 회사 노조의 슬로건은 ‘라이프 업 유니언(Life up union)’. 즉 조합원 개개인이 충실한 인생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서포터(도우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에는 생명, 생활, 인생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노조는 근로자의 라이프를 지원하고, 이를 통해 안정을 얻은 근로자가 일에 전념함으로써 회사 성장과 사회발전에 공헌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노조가 특히 신경 쓰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부분은 재무 설계다.

세이코엡손 노조의 이런 활동은 1990년대 중반 시작됐다. 이 무렵부터 노조의 역할이 임금인상 투쟁과 노동환경 개선 투쟁을 위한 파업 중심에서 라이프 서포트 활동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만이 근로자의 가처분소득을 늘릴 수 있는게 아니라, 제대로 된 재무교육을 통해 불필요한 가계지출을 줄이고 가계자산 운용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이프 서포트 활동을 처음 제안했고 주도해온 사람이 시미즈 부위원장이었다. 그는 이 회사 프린터 생산라인의 생산직 근로자였다. 어느 날 선배의 권유로 노조 상근으로 가게 됐다. 신임 임원 연수의 강사로 초빙된 한 경영컨설턴트의 강의 내용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이다. 시미즈 부위원장은 16년 전에 받은 강의 내용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제 노조 임원은 경영자 이상의 경영 감각이 필요하다. 자신이 직접 3~5개 회사의 주식을 골라 투자해보고 기업을 보는 안목을 키워라.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읽을 정도의 공부는 필수다. 역사소설도 읽어라. 인간과 금융을 보는 눈이 생길 것이다. 노조 조합원들의 가계상담과 지원이 가능하도록 공부를 해라.”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 강의에 감동을 받은 시미즈 부위원장은 노조활동의 방향을 바꾸는 데 앞장섰다. 임금 협상에 매달리기보다 근로자의 기존 소득을 불려줘 조합원들이 안정적인 생활설계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시작은 미미했다. 첫 작품으로 보험·주택담보대출에 관한 기초 정보를 담은 소식지를 발간했다. 맞춤형 보험설계를 위해 세미나도 열었다. 하지만 소식지를 받은 조합원 가운데 도움이 됐다는 답변을 보낸 사람은 단 2명뿐이었다. 세미나 참석자도 5명에 불과했다.

그는 전략을 바꿔 회계담당 직원을 공략했다. 세이코엡손은 남성 기술자가 대부분이었지만 회계담당 직원은 여성이 많았다. 이들이 자산관리에 관심이 많을 것이라는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5년 이상 교육을 이어가자 여성 노조원들이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95년 처음 세미나를 열었을 당시 5명이었던 참석자는 2000년 이후 연평균 2000명으로 늘어났다.

노조의 교육 내용은 다채롭다. 노조 홈페이지에 재무설계사 칼럼이 연재된다. ‘부자 계산기’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연령대별로 주택대출, 교육, 노후자금 등 필요 자금을 계산해 볼 수 있도록 했다. 개별 상담도 가능하다. 지부·본부 단위로 매년 100회 가까운 세미나도 개최한다.

특별히 은퇴 이후에 대비한 교육에 힘을 기울인다. 노후의 주요 수입원인 퇴직연금 운용에 관해서도 꼼꼼하게 교육한다. 시미즈 부위원장은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철저하게 재무관리를 시켜 은퇴 뒤 재정적인 어려움이 없도록 만드는 게 핵심”이라며 “은퇴 이후 느낄 상실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신교육과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한 직업교육, 취미교육에도 공을 들인다”고 말했다.

라이프 서포트 활동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시미즈 부위원장은 또 한 사람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일본 독립계 자산운용사의 최고경영자(CEO)로 널리 알려진 사와카미 투신의 사와카미 아쓰토 사장이다. 한 세미나장에서 사와카미 사장의 강연을 듣고 그의 투자철학에 매료당한 것이다.

“개인 투자자, 특히 근로자 가정의 장기 재산 형성을 도와주는 자산운용사가 되는 것이 우리 회사의 경영이념이다. 우리가 운용하는 펀드에 투자한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장기운용’이라는 항해를 하는 것과 같다. 장기적으로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제대로 운용하면 운용성적은 자연히 올라가게 돼 있다. 좋은 운용성적은 투자자인 고객과 운용회사의 공동작업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투자신탁의 모습이다.”

그 일은 바로 노조가 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여기에 생각이 미친 시미즈 부위원장은 이후 수십 번에 걸쳐 사와카미 사장을 방문해 장기투자의 노하우를 배웠다. 사와카미 사장의 지원을 받아 노조 산하에 우량펀드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자산운용사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노조 상근자 40명의 절반 이상인 26명이 금융상담 전문가, 즉 FP 자격을 갖고 있을 정도로 지원체제도 갖추었다.

현재 라이프 서포트 활동은 경영지원활동, 사회공헌활동과 더불어 세이코엡손 노조의 3대 활동의 하나로 정착돼 있다. 일본 내 다른 기업에도 이 활동이 전파되고 있다. 세이코엡손 노조라고 하면 라이프 서포트 활동이 떠오를 정도가 됐다. 인생 100세 시대의 근로자를 위한 노조 활동은 어떻게 전개돼야 하는가. 노조간부 한 사람의 열정이 노조활동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이 문제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강창희(64) 서울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 도시샤대학원에서 상학 석사를 취득했다. 1974년 증권거래소에 입사한 뒤 대우증권 리서치센터장, 현대·굿모닝투자신탁운용 대표를 거치며 30여 년간 증권업계에 몸담았다. 이후 은퇴설계 전문가로 변신해 미래에셋그룹 퇴직연금연구소장 겸 투자교육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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