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넘어서
⑥ 일가 망명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여류 독립운동가였던 정정화는 자서전
그렇기에 사대부들의 횡도촌 집단 망명은 더욱 큰 가치가 있었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
또한 이회영은 집안 형제들을 설득했다. 이관직의
이 당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명가 출신들에게는 봉건적 구습 타파에 앞장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회영은 첫부인 달성 서씨와 사별한 후 한산 이씨 은숙(恩淑) 여사와 재혼하는데 이 여사의 자서전
이상룡의 사돈이기도 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도 마찬가지였다. 1908년 13도창의군 군사장(軍師長)으로서 의병들의 서울진공작전을 총지휘했던 허위는 1904년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자 제출한 10가지 개혁안 중에 아홉 번째가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신분제, 남녀차별 같은 봉건적 인습이 조선 사회를 낙후시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는 뼈아픈 반성이 담긴 행위였다.
이정규는
일가가 이런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둘째 석영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 이은숙 여사가 “영석장(潁石丈:이석영)은 우당 둘째 종씨(從氏)인데, 셋째 종숙(從叔) 댁으로 양자(養子) 가셨다. 양가(養家) 재산을 가지고 생가(生家) 아우들과 뜻이 합하셔서 만여 석 재산과 가옥을 모두 방매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에게 출계(出系)해 상속 받은 1만여 석의 재산을 내놓았던 것이다. 1911년 발생하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의 자금 모금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서 이회영 형제의 재산이 주요한 ‘광복 자금’이 되었다.
이회영 일가는 가산을 급히 정리하고 서울을 떠나 신의주에 도착했다. 이은숙 여사는 “신의주에 연락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酒幕)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타인 보기에는 주막’이 이건승·홍승헌 일행이 달포 이상 몸을 숨겼던 신의주 사막촌(四幕村)이었다. 이은숙 여사는 압록강 도강 장면에 대해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가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세 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강빙(江氷:얼어붙은 강)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된다. 그러면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李宣九)씨가 마중 나와 처소(處所)로 간다”고 묘사했다. 압록강을 건넌 망명객들은 안동현에서 이동녕의 매부 이선구의 안내를 받아 횡도촌으로 향했다. 횡도촌에서는 이동녕의 친족 이병삼이 망명객들을 맞이했다.
이회영 일가는 워낙 대가족이었기에 여럿으로 나누어 각각 압록강을 건넜다. 이은숙 여사는 “우당장(이회영)은 며칠 후에 오신다고 하여 내가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하여 몇 시간 머물다가 새벽에 안동현에 도착하니, 영석장(이석영)께서 마중 나오셔서 반기시며 ‘무사히 넘어 다행이라’ 하시던 말씀을 지금도 상상이 되도다”라고 회고했다. 이은숙은 “12월 27일에 (이회영이) 국경을 무사히 넘어 도착하시니 상하 없이 반갑게 만나 과세(過歲:새해 맞이)도 경사롭게 지냈으나 부모지국(父母之國)을 버린 망명객들이 무슨 흥분이 있으니요”라고 회고했다.
1910년에 나라는 빼앗겼지만 1911년 새해는 망명지에서 맞이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1911년 정월 9일 6형제 일가족 40~60명은 말과 마차 10여 대에 나누어 타고 안동현을 떠나 횡도촌으로 향했다. 이은숙은 “6~7일 지독한 추위를 좁은 차 속에서 고생하던 말을 어찌 다 적으리요. 그러나 괴로운 사색(辭色)은 조금도 내지 않았다”면서 “종일 백여 리를 행해도 큰 쾌전(快廛:큰 가게)이 아니면 백여 필이 넘는 말을 어찌 두리요. 밤중이라도 큰 쾌전을 못 만나면 밤을 새며 가는 때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렇게 6~7일을 달려 이회영 일가는 횡도촌에 도착했다.
횡도촌에는 먼저 도착한 정원하·홍승헌·이건승 같은 소론계 강화학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작은 마을 횡도촌에서 상봉한 것이었다. 강화학파의 행적을 추적한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망국에 무한책임을 느끼는 선비들로서 망명지에서 상봉한 것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또한 순탄하지 못할 앞날도 감정의 표출을 자제케 했다. 훗날 민족단일전선 신간회의 회장이 되는 월남 이상재(李商在)는 이회영 일가의 망명 소식을 듣고,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라고 평했다. 그러나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에게는 이후에도 시련의 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