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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과학자 끌어들이는 매력, 아인슈타인과 쌍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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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호 28면

1938년 독일의 오토 한이 우라늄235 연쇄반응 실험에 성공했다. 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우라늄 원소가 새롭고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현상은 단 하나의 폭탄으로 항구 전체뿐 아니라 그 주변까지 파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믿지 않았다.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 ‘과학계의 덕장’ 덴마크 닐스 보어

40년 2월에는 로버트 프리시가 영국에서 우라늄 폭발의 임계질량을 계산해 보고했다. “1~2파운드의 우라늄235로 핵폭탄을 만든다.” 두 달 후 영국은 ‘우라늄 폭발의 군사적 응용 위원회’를 구성했지만, 독일의 공습 때문에 핵무기 공장을 건설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밀보고서를 급히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는데 루스벨트의 측근인 라이먼 브리그스가 서류를 자기 금고에 처박았다.

결국 아인슈타인이 4번씩 편지를 보낸 뒤 42년 9월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책임은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 장군이 맡았다. 마침내 45년 7월 16일 원자폭탄이 개발됐다. 그리고 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우라늄235로 만든 첫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7만명이 즉사했다. 3일 후 나가사키에 플루토늄239로 만든 두 번째 원폭이 떨어져 6만 명이 죽었다.

원폭 개발에 그동안 13만 명과 22억 달러가 투입됐다. 참여 과학자들 중 노벨상 수상자만 21명이다. 그들 과학 천재들의 이야기들은 삼국지의 영웅들처럼 역동적이다.

그 가운데 덴마크의 닐스 보어(사진)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과학계의 쌍벽을 이루는 과학자로서 삼국지의 유비 같은 사람이다. 그의 주변엔 당대의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아인슈타인은 21년에 광전효과로, 닐스 보어는 22년에 ‘원자구조와 원자에서 나오는 복사에너지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으로, 닐스 보어는 고전물리학의 인과율을 ‘양자역학에서의 상보성’이라는 방식으로 바꿨다. 자연 현상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결정론을 주장했고 닐스 보어는 우연에 근거해 현상이 나타난다고 해 오래 논쟁을 벌였다.

실제로 원폭 투하 과정을 보면 보어의 우연론이 더 맞는 것 같다. 원래 두 번째 원폭의 목표는 나가사키가 아니라 고쿠라였다. 8월 9일 B-29 석 대로 구성된 원폭 편대가 출격했다. 그런데 한 대가 일본 해안의 집합 장소에서 재집합하는 데 실패했다. 할 수 없이 두 대만 예정시간보다 30분 늦게 고쿠라 상공까지 갔다. 그런데 이번엔 시야 확보가 안 됐고 연료마저 부족했다. 그래서 제2 목표인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세 번째 B-29가 제때 왔다면 나가사키 대신 고쿠라가 폭탄을 맞았을 것이다.

한편 36년 히틀러는 ‘독일인은 노벨상을 받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렸다. 그래서 나치 치하에선 노벨상 금메달이 오히려 신변을 위협했다. 여기 닐스 보어와 연관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40년 닐스 보어가 나치로부터 과학자를 보호하기 위해 열고 있던 코펜하겐 연구소의 헝가리 출신 화학자 게오르크 헤베시 이야기다.

40년 독일군이 연구소를 수색하러 오고 있었다. 시간은 없고,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랭크의 노벨상 금메달을 숨기는 것이 문제였다. 실험실의 용액 병이 눈에 띄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원래 금은 어떤 산에도 녹지 않는다. 그래서 금속의 왕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염산과 질산의 비율을 3대1로 만든 왕수엔 녹는다. 그래서 금속의 왕을 녹인다고 해서 이름이 왕수다. 헤베시는 왕수 병에 금메달을 담갔다. 금메달은 완전히 녹아 노란 용액만 남았다. 병을 실험실 제일 위 선반에 두고 탈출해 스웨덴으로 갔고, 43년 X선 분석의 화학적 응용과 동위원소의 생리학적 응용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제2차 대전이 끝나자 헤베시는 닐스 보어 연구실에 들러서 왕수 병을 다시 찾았다. 구리 조각을 왕수 병에 넣자 구리가 녹으면서 한쪽에서 금이 다시 나왔다. 구리가 이온화 경향이 금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그 금을 노벨위원회에 보내 다시 금메달로 만들었다.

43년 9월 닐스 보어도 가족과 함께 스웨덴으로 탈출해 10월 초 영국으로 건너갔고, 12월 미국으로 가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아들 오게 보어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실질적 개발보다는 원자폭탄 이후의 위험을 더 생각했다. 그래서 44년 7월 3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핵무기의 개발과 사용을 규제하는 국제위원회를 만들고 핵전쟁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얘기했다. 윈스턴 처칠도 만나 힘 있는 집단들이 핵무기를 개발할 위험성을 전했다. 50년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그의 주장대로 국제 원자력 기관 설립이 논의됐다. 그 뒤 60년이 지났다. 아직도 세계는 핵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반도도 마찬가지다.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해결하는 길은 무엇일까? 선각자의 지혜가 아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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