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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 8월의 주제 ‘여름 배낭 속의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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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본격적인 휴가 시즌이다. 긴장을 풀고 계곡에서, 혹은 바다에서 몰입해 읽는 책은 꿀보다 달다.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공동 기획하는 ‘이 달의 책’ 8월 주제는 ‘여름 배낭 속의 책’이다. 어느 산만한 장소에서라도 일단 잡았다하면 빠져들게 하는 소설, 읽다가 자꾸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논픽션 에세이,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춘 책 세 권을 골랐다. 책과 더불어 재충전의 시간을 만끽하시길.

백인 사위와 한국인 장모의 좌충우돌 식료품점 운영기

마이 코리안 델리
벤 라이더 하우 지음
이수영 옮김, 정은문고
431쪽, 1만5000원

“나는 모든 결정의 순간마다 우주적 의미를 고려하는 사람이다.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윤리의식의 시험대에 오르며, 몸에 걸친 실오라기 하나에도 나의 개성을 표현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과민증 부르주아 자기애와 과잉교육의 결과이며….”

 ‘나’는 미국의 저명한 문예지 ‘파리 리뷰’(The Paris Review)의 편집자다. 비록 박봉일 지언정 원고 더미에 파묻혀 지내며 남부러울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2002년 모든 게 바뀌었다. 그가 쓴 『마이 코리안 델리』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2002년 여름, 나와 처가 식구들은 델리(deli) 하나를 사기로 했다.”

『파리 리뷰』 전 편집자 벤 라이더 하우(오른쪽)는 억척스러운 장모와 델리를 운영하며 한국 문화를 뼛 속 깊이 체험했다. 하우가 쓴 『마이 코리안 델리』는 뉴욕의 한국인 가게 풍경을 경쾌한 소설처럼 쓴 논픽션 에세이다. 책의 내용은 할리우드서 영화화될 예정이다. [정은문고 제공]

 한국 여성과 결혼한 백인 남자가 처가살이 하며 식료품점을 운영한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 에세이다. 이 책을 먼저 읽은 미국의 한 독자는 리뷰에서 “할렘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데도 손 안에 든 책에 푹 빠져 있다”고 했는데, 그게 전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은이의 생생한 묘사력 때문에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주인공과 함께 뉴욕 구석을 누비며 가게 자리를 보러 다닌 기분이다. 가게를 차린 후엔 부르클린의 비좁은 델리를 이미 수없이 들락거린 듯하다.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리게 하면서도 문화충돌, 가족, 사랑, 돈과 일 등의 주제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와 폴리머스에 정착한 선조의 후예, 문화인류학자 부모 밑에 자란 전형적인 청교도 기질의 ‘나’와 ‘권투선수 챔피언’같은 장모 케이는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른 인물이다. “제값 제시하면, 얕본다”며 모든 사람과 막무가내 흥정을 벌이는 장모에게 “가격표란 협상을 시작하는 하나의 지점일 뿐이다.” 장모는 계산대 앞에서 “휘몰아치는 말발굽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단추를 누르고, 사위 앞에 두 브랜드의 콘돔 상자를 들이대며 ‘어떤 게 더 잘 팔리겠느냐’고 다그치듯 묻는다. 그러니까 장모 케이는 저돌적이고, 직설적이고, 뼈빠지게 일하는 ‘한국인’의 전형인 셈이다.

 책을 읽다보니 엉뚱하게도 “시시한 배우는 있어도 시시한 배역은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평범한 생활과 주변의 ‘그렇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작가의 독특한 시선과 솜씨에 따라 어떻게 보석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게의 물건 자리가 살짝 바뀌어도 불평해대는 단골손님, 델리와는 또다른 세계인 파리 리뷰 편집실, 친척들이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스태튼 아일랜드의 박씨네 집 이야기는 재미있고, 애틋하고, 충분히 극적이다.

 책은 여러 겹의 껍질로 싸인 양파같다. 소규모 자영업 경험담이 가장 바깥 쪽의 껍질이라면, 한국과 미국 문화 차이, 이주민의 삶, 다인종이 모여사는 뉴욕이라는 도시, 일한다는 것의 의미까지 다룬다는 점에서다. 이처럼 ‘핫한’ 재료를 경쾌한 위트로 버무릴 줄 아는 작가가 새로 등장했다. 반갑다.

이은주 기자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한마디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의 진실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348쪽, 1만3800원

매혹적인 소재를 역량 있는 작가가 잡았다.

 십자군 전쟁, 인류 역사상 가장 긴 200년 동안, 세계 2대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이 벌인 전쟁이다. 참전국이나 인원으로 보든, 이후의 파장으로 보든 진정한 의미의 첫 세계대전이었다. 유럽이 아시아를 잠식해 들어오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시오노 나나미, 이 일본의 여류소설가는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로마제국의 역사를 다룬 15권 짜리 『로마인 이야기』는 국내에서도 밀리언셀러가 됐다. 인간과 드라마로 역사의 디테일을 채운 그의 작품은 한 번 손에 들면 쉽게 놓을 수 없는 매력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당연히 책은 흔한 말로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췄다는 믿음이 갈 수밖에 없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도움을 청하는 동포(비잔틴 제국의 그리스 정교도)들을 위해 이교도와 싸울 것을 촉구하자 군중들 사이에서 터져나온 함성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하게 예루살렘을 회복하자는 신앙심에서 비롯된 성전(聖戰)이 아니었다. 실은 황권과 교권 간의 대립에서 삐져나온 고도의 정치적 책략이었음을 찬찬히 보여준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간에 벌어졌던 ‘카노사의 굴욕’에서 시작해 중세 유럽의 정치지형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또 있다.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 부응해 맨처음 참전을 맹세한 르퓌의 주교 아데마르, 툴루즈 백작 레몽은 공의회 이전 교황과 만났던 사실을 적시해 ‘사전 협의’가 있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전 3권 중 첫 권인 이 책은 이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해 왕국을 세운 뒤 그 왕 보두앵의 죽음으로 ‘십자군 1세대’가 퇴장하는 시기까지를 다뤘다. 이 과정에서 십자군이 왜 십자군으로 불리게 됐는지, 예루살렘을 정복한 기독교 전사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등 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없는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꼼꼼한 자료조사와 나름의 해석으로 읽는 맛을 더하는 작가의 솜씨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작품이 ‘역사’도 아니며 ‘소설’도 아니라는 비평을 하지만 ‘이야기’의 흡인력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 전거가 불확실하다든가, 유럽적 시각에서 쓰였다든가 하는 지적 대신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민 말루프 지음, 아침이슬)을 보면서 역사를 보는 눈을 보정하면 어떨까 싶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청춘을 알기도 전에 … 일찍 늙는 병에 걸린 열일곱살 소년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창비
355쪽, 1만1000원

이런 문장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에게는 진통제가 필요하듯 네겐 너보다 더 아픈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닐까. (중략) 만일 네게 그게 필요하다면 나는 그걸 주고 싶다고. 왜냐하면 나는 네가 좋고, 가진 것이 별로 없으니까.”(267쪽)

 『두근두근 내 인생』은 김애란의 첫 장편소설이다. 한국 문단의 기대주니 희망이니 하는 수식어, 진부하다. 김애란은 이제 김애란이다. 그 이름만으로 브랜드 파워가 있다. 『달려라, 아비』『침이 고인다』 같은 소설집에서 보여줬던 역량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이 책, 역시 김애란이다.

 열일곱살 동갑내기가 사고 쳐서 낳은 아름이가 주인공이다. 부모의 그 나이(열일곱살)가 된 화자는 희귀병으로 인해 신체 상태가 80세와 같다. 아이도 아니고 노인도 아닌 조로(早老)한 소년은 청춘을 알기도 전에 죽음을 예감한다. 어느날 그에게 동갑내기 소녀의 위로 메일이 온다. 암환자라고 밝힌 소녀와 메일을 주고 받는 동안 소년은 생기를 되찾지만,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한다.

 여느 좋은 소설이 그렇듯, 책은 여러겹의 독해 코드를 숨기고 있다. 자라지 않는 성장의 서사와 잉여 인생에 대한 콤플렉스 등. 무엇보다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에 대한 작가의 자문자답으로 읽힌다. 처음 언어를 배운 순간부터 시작해 부모에게 자신이 지은 소설을 건네면서 끝나는 여정. “아버지, 내가 아버지를 낳아드릴게요. 나 때문에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드릴게요.”(324쪽)

 태어나고 자라고 세상을 깨우치고 불화하고 이별하는 생의 단계들을, 부모 세대에서 물려받은 언어로 다시 써내려 갔다. 하루하루 늙어가는 독자들의 심장을 ‘두근두근’ 다시 뛰게 한다. 어머니, 저를 이렇게 낳으셨군요, 키우셨군요. 나는 작가가 얼마나 아픈 생을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심하게 앓았던 사람만이 명의(名醫)가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중간중간 곁들여진 유머까지, 역시 김애란이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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