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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족 캠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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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MY LIFE는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재조명하고자 ‘행복한 가족 캠페인’을 기획했다. 잊었던 가족의 사랑을 새로이 발견한 훈훈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전달된다. 또 이 캠페인의 일환으로 캠핑을 통해 가족애를 다지는 건강한 가족들의 모습들이 전달될 예정이다. 그 시작으로 인생의 황혼기에 부부의 의미를 새로 발견한 안충웅·최숙희씨 부부의 이야기를 준비했다.

“저는 새벽 4시의 사나이였습니다. 통금시간이 있던 시절, 밤 12시가 돼야 서둘러 귀가했고 통금이 풀리는 새벽 4시가 되면 집을 나섰죠. 일이 곧 내 인생이었습니다. 중견기업을 키워낸 저를 누군가는 멘토라 부르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도 말하지만 은퇴는 또 달랐어요. 치열했던 일도, 친구라 생각했던 이들도 떠났습니다. 2년 동안 병원에서 혹독하게 아팠던 뒤로 아내와 나는 캠핑카를 샀습니다. 우리에게 여행은 살아남기 위해, 앞으로도 잘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최선이었습니다. 지금 아내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소중한 사람입니다.”

 안충웅(71)·최숙희 부부는 캠핑 매니어다.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주문 제작한 캠핑카를 타고 전국을 누비는 여행가다. 한적한 방파제 근처에 캠핑카를 세우고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는 낚시꾼들이다.

 안씨는 덩치가 큰 캠핑카지만 “길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 길은 다르기도 하다.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는다. 만일 길이 아니라면 돌아가면 될 일이다. 돌아가는 길이 바로 가는 길보다 흥미롭다. 사람도 만나고 하늘도 바라보고 굽이쳐 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다. “누구보다인생을 빨리 달려왔다”는 안씨는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인다. “결국 뛰어봤자 여기인데…” 그의 마음을 헤아린 듯 아내 최씨가 김태곤의 ‘송학사’ 한 구절을 나지막하게 부른다.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갈래 깊은 산속 헤매나~”

일에 빠져 산 36년
 
 1971년 일을 시작한 그에게 36년간 일을 빼놓은 일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사업상 미국법인을 설립할 때는 1년 중 7개월을 미국에서 살았다. 아이들 교육은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가족을 위해 바쁘게 사는 것이 남자가 할일이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내 최씨 역시 숨가쁠 수밖에 없었다. 이사같은 집안 일에서는 물론이고 병원에서 출산을 하고도 아내는 혼자였다. 남편 눈치도 봐야했다. 밤늦게 집에 온 남편의 얼굴이 좋지 않으면 아이들을 얼른 방으로 들여보냈다. 남편의 기분에 온 가족이 울고 웃었다. 안씨는 “아내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사실 가족의 소중함은 모르고 살던 때”라고 회상했다.

 나름 성공한 삶이라 자부했지만 그래도 2006년 찾아온 은퇴는 갑작스러웠다. 모양새는 완벽한 은퇴였지만 공허한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건강도 나빠져 2년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나빠진 건강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위궤양으로 변기가 붉어질 때까지 피를 토했다. 의사가 “무슨 스트레스를 그렇게 받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현역 시절 ?풀과 나무도 살아가는 스트레스는 있다. 파도처럼 오는 스트레스를 전면으로 받아라?라고 했어요. 나름 직원들에게 삶의 가치를 가르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헛소리였던 거 같아요. 결국 실적 올리라고 스트레스 준거지. 그래서 내가 인기가 없었나봐요(웃음).”

 그래도 그는 낙관적이다. “작년보다 나은 올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라면 괜찮다”고 안씨는 말한다. “젊은 사람이 열흘 걸리는 일을 우리가 백일 동안 배운다 해도, 어제보다 나은 삶이라면 해 볼만 하다는 얘깁니다.”

부부의 대화, 그리고 타협

 부부는 요즘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처음 은퇴했을 때만 해도 대화가 아닌, 싸움의 연속이었다. 은퇴 후 갑작스런 자유에 공허감을 느끼는 남편과 이미 안정되게 자신만의 생활 스타일이 굳어진 아내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치열한 싸움 끝에는 깨달음과 타협이 이뤄졌다. 어차피 같이 살 것이라면 서로 상처 주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다짐한 것. 이 와중에 남편은 아내 명의로 해둔 것이 전화기 하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 후 남편은 아내에게 집을 양도하고 돈 관리를 맡겼다. “생사는 스스로 조율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는 안씨는 “그에 비하면 아내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쉬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일 떠날 것처럼 오늘을 살라는 말, 그리고 내일 떠날 것처럼 오늘 가족을 대하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와닿고 있습니다.”

 은퇴에 이어진 2년간의 투병 후 부부는 앞으로의 인생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아내는 “건강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가족이 함께 하는 세월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2008년 캠핑카를 구입하기에 이른다. “어떻게 보면 살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아내 최씨는 덧붙였다. 아내는 2년간이나 아팠던 남편이 좋아할 만한 일을 찾은 것 자체가 기뻤다. 대여하는 캠핑카의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부부는 본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캠핑카를 주문하기로 결심했다. 조리대를 자신들의 키에 맞추고 소파의 색깔, 테이블의 각도와 TV, 가스탱크의 위치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경치 좋은 곳에서 휴식

 인생은 아주 작은 용기로 달라진다. 안씨는 요즘 자아를 찾은 기분이다. “정선 오대천에서 캠핑을 할 때였어요. 낚시로 잡은 작은 피라미 몇 마리에 충만한 기분이 들더군요. 낚시하다 말고 피라미 쳐다보고 좋아하고. 내가 이런 사소한 것에 기뻐하는 사람인줄 몰랐어요.”

 여행은 아내와 의논해 다니는데 서로 마음이 맞으면 언제든 짊을 챙겨 떠난다. 부부가 특히 선호하는 여행지는 섬이다.최씨는 “우리나라에 유인도가 2000개에 이르고 모두 차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며 “섬에 다니며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고 전했다. 소박하고 친절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다보면 저절로 마음도 치유가 된다. 부부는 경치 좋은 곳 방파제 근처에 캠핑카를 세우고 낚시하는 걸 즐긴다. 캠핑카는 어디든 세우고 지낼 수 있어 좋다. 차를 세우고 여정을 풀면 “근처의 자연과 경치가 모두 내 것이 된다”고 부부는 말한다.

 물론 불편한 점도 있다. 차의 덩치가 커서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엔 세울 수 없다. 차 위로 나뭇가지 등이 걸리지 않는지도 살펴야 한다.

 여행 중에 아내가 마냥 한가한 것만은 아니다. “요리도 해야 하고, 현지에서 캠핑카가 신기하다고 놀러 온 사람들에게 간식도 내줘야 하고요. 함께 웃고 얘기하다보면 소주 한 박스가 없어지기도 해요. 또 낚시를 해서 잡은 고기는 손질도 해야하죠.” 최씨는 “인생이 뭐 편하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남편이 나를 위해 꿈을 접었다는데, 이런 것도 못해주겠어요? 사실 내가 성격이 좋기도 하고요”라며 웃는다.

 이제 부부가 취향이 같다는 사실이 새삼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명품이나 비싼 외제 차가 부러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최씨는 “어디 여행 간다는 사람들 얘긴 그렇게 부럽더라”고 회상했다. 둘만의 여행 계획을 잔뜩 세워놓았으니 이제 최씨는 남부러울 일이 없다.

 부부가 캠핑 일정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때다. 냉동실에 얼렸다 내놓은 컵에 시원한 맥주를 따르며 아내는 ‘우리 신랑이 기뻐하겠지?’라는 생각에 자신이 먼저 기쁘다. 남편은 아내가 준비한 차가운 맥주를 한 입 마실 때를 최고의 순간으로 친다. 그 때의 맥주는 “형용할 수 없는 맛”이라고 안씨는 설명한다.

 부부는 곧 중국 공명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함께 가는 일행은 2년 전에 캠핑을 하며 새로 사귄, 외국여행을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친구들이다. “여행 준비부터 현지에서 적응하는 법, 그리고 여행을 즐기는 방법을 잘 알려주고 싶다”고 부부는 말한다. 새로운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 부부는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사진설명] 은퇴 후 계절마다, 짬이 나는대로 캠핑카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는 안충웅·최숙희 부부. 사진은 춘천 소남이섬에 캠핑을 하러 갔을 때다.

<이세라 기자 slwitch@joongang.co.kr 사진="안충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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