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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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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시인 윤제림씨는 느긋했다. “새로움을 추구하기보다 내 타고난 성량대로 쓰던 시를 계속해서 쓰겠다”고 했다. “노력한다고 가수 이미자가 달라지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여유에서 웃음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시인 윤제림(52)씨의 생업은 카피라이터다. 동국대 국문과 77학번인 그는 졸업 후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에 취직했다. 꼬박 10년을 일하고 독립했다.

 2003년부터는 서울예대 광고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며 프리랜서로 광고 일을 한다. 업계에서나 학교에서 통하는 그의 본명은 ‘준호’다. 언제 한 번 만나자는 의례적인 인사말 하지 마라, 사랑은 미루는 게 아니다 같은 감각적인 내용으로 몇 해 전 주목 받았던 한 통신사의 광고 카피가 그의 작품이다.

 ‘광고쟁이’가 연상시키는 세련된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시인으로서 윤씨는 학연·지연은 물론 띠 동갑 같은 것까지 챙기는 좀 촌스런 사내다. 같은 과 동기인 문학평론가 장영우씨의 증언이다. 나고 자란 곳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그의 필명 ‘제림(提林)’은 고향 제천(提川)의 명물 의림지(義林池)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이런 면모에 어울리게 그의 시 세계는 시치미 뚝 떼고 사람 웃기는 유머가 두드러진다는 평을 받아왔다.

 유머와 해학은 올해 윤씨의 미당문학상 후보작들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읽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환해지며 키득거리게 되는 시가 한 두 편이 아니다.

 전문을 소개한 시 ‘매미’의 첫 행을 윤씨는 굳이 ‘내가 죽었는데’가 아니라 ‘내가 죽었다는데’로 썼다. ‘죽었는데’라는 담담한 진술이 아니라 약간 과장된 ‘∼다는데’를 떡 들여앉히고 보니 어쩐지 ‘매미가’ 앞에 ‘세상에나’ 같은 말이 생략돼 있는 것 같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미물이 자신의 죽음을 열심히 슬퍼하는 광경과 맞닥뜨린, 귀신도 못된 허깨비 화자의 황당해하는 정경이 실소를 자아낸다. 두 번째 연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된 일종의 유체이탈 같은 상황.

 세 번째 연의 ‘대체 누굴까’는 시를 단순히 웃기기만 하는 상황에서 구해낸다. 매미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까닭은 뭘까. 윤씨의 2008년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의 해설에서 시인 이홍섭씨는 윤씨 시의 특징의 하나로 불교적 세계관을 꼽은 바 있다. 모든 존재는 여러 요소들이 끝없이 어우러지고 의존하면서 성립한다는 이른바 연기(緣起)적 세계관이다. 매미는 혹시 시의 화자의 우주적 친구인 것은 아닐까.

 정작 윤씨는 자신의 시의 해학적 요소에 대해 시치미를 뗐다. 의도한 게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실제로는 굉장한 비관론자이자 엄숙주의자”라고 했다.

 예심을 한 최정례 시인은 “과거 윤씨는 유머를 잘 쓰면서도 약간 조선시대 선비 같은 고답적인 데가 있었는데 이번 후보작들은 모던한 느낌까지 더해져 발랄하면서도 경쾌하다. 골고루 좋다”고 평했다.

신준봉 기자

매미

내가 죽었다는데, 매미가 제일 오래 울었다

귀신도 못되고, 그냥 허깨비로

구름장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니

매미만 쉬지 않고 울었다

대체 누굴까,

내가 죽었다는데 매미 홀로 울었다

저도 따라 죽는다고 울었다.

◆윤제림=1959년 충북 제천 출생. 8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 『그는 걸어서 온다』 등. 서울예대 광고창작과 교수.

‘친한 사이’라도 머릿속 계산기는 돌아간다

소설 - 권여선 ‘은반지’

그런데 소설의 제목이 왜 ‘은반지’일까. 오여사와 심여사가 함께 살던 때 일종의 커플링을 은반지로 맞췄다. 왜 금반지도 아니고 은반지일까. 은반지는 소설의 절정 부분에서 튀어나온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권여선(46) 만큼 캐릭터를 생생하게 구축하는 작가도 흔치 않 다. 이번 황순원 후보작 ‘은반지’의 등장인물은 대여섯 정도 되는데, 사소한 인물의 캐릭터도 어찌나 생생한지.

 주인공 ‘오여사’. 본명 오현숙. 만 59세. 여러 해 전 남편이 교통사고로 훌쩍 떠난 뒤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심여사를 집에 들여 5년을 살았다. 보증금도 받지 않고 생활비만 반을 부담하도록 아량을 베풀었다. 그런데 심여사는 무슨 이유에선지 밀린 생활비 15만원도 내지 않은 채 6개월 전 집을 나갔다.

 소설은 오여사에게 작은딸이 가게라도 차리게 돈을 빌려달라고 전화를 걸어오면서 시작된다. 오여사는 단호히 거절하고 딸은 그런 엄마에게 악담을 퍼붓는다, 심여사가 있었더라면 그녀가 차려준 밥상을 느긋하게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오여사는 큰맘 먹고 심여사가 머무는 요양소를 찾아간다. 심여사가 제 발로 돌아오겠다고 나서길 내심 바라면서.

 반년 만에 만난 두 여인. 오여사는 심여사를 ‘심여사’라 부르고, 심여사는 꼬박꼬박 ‘오여사님’이라 높여 부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관계는 역전돼간다. 처음엔 “오여사님 은혜는 잊지 않고 있어요”라던 심여사가 오여사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듣자 “말씀은 너무 고마우신데, 기껏 빠져 나온 개골창에 도로 처박힐 순 없지요”라 대꾸하니 말이다. 분위기는 점점 묘해져, 심여사는 통성기도를 하도 열심히 해 쉬어버린 목소리로 “모든 걸 버리고 요양소에 들어오라”고 한다. 해는 저물어가고, 막차 끊길 시간은 되어가는데 심여사는 오여사를 놓아주지 않는다. 오여사의 입장에선 호러·공포물로 달려가는 셈인데, 독자 입장에선 웃음이 나온다.

 권씨의 작품엔 ‘섬뜩, 오싹, 불쾌’란 수식어가 따라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은반지’와 지난해 황순원문학상 후보작으로 오른 ‘팔도기획’에는 유머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작가는 “이 나이에, 신인처럼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등장인물들은 제각각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린다. 자신만의 방정식으로 견적을 뽑아낸다. 그러니 오여사는 심여사가 왜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지 알 까닭이 없다. 권 작가는 “누구의 머릿속에서나 계산기는 자동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계산기가 의식적으로 통제되는 수준에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자기가 살아온 딱 그만큼 저절로 알아서 돌아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축적된 경험이 시키는 대로, 딴엔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해괴한 결과를 빚어내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리라.

 “뒤늦게나마 멈추려 해도 계산기는 여전히 돌아가죠. 자신이 살아온 만큼 어김없이 재깍재깍. 오래된 친밀한 관계일수록 그런 계산기의 이면을 잘 보여줄 수 있어요. 과거를 공유해왔으니까요.”

 백지연 예심위원은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도 소통이란 굉장히 어렵고, 여러 가지 겹을 가지고 있다. 권여선은 그 바닥까지 내려가 낯선 것을 끄집어내며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이경희 기자

◆권여선=1965년 경북 안동 출생. 96년 상상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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