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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좀 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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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도쿄 특파원

며칠째 기분이 영 개운치 않다. 3주 전 모처럼 가족이 외출해 먹은 쇠고기가 주범이다. 당시만 해도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이른바 ‘세슘 쇠고기’ 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을 때다. 하지만 일종의 직업병이 작동했다. 음식점에 들어가면서 가족들 몰래 종업원에게 물었다. “여기 쇠고기 어디산이에요.” “네, 니가타(新潟)산입니다.” 그 말에 안심했다. 사고가 난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에서 200㎞가량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얘들아, 많이 먹어라.” 그날 가족 모두 배부르게 니가타산 쇠고기를 먹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후쿠시마산 쇠고기에서 세슘이 검출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별로 놀라진 않았다. 후쿠시마현만의 일이거니 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충격이었다. 후쿠시마 인근 미야기(宮城)현, 야마가타(山形)현으로 번지더니 드디어는 니가타현 이름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니가타현 소 일부가 세슘에 오염된 후쿠시마산 볏짚을 사료로 먹었고, 도쿄 등 10개 광역 지자체에 유통됐다”고 한다. ‘후쿠시마 쇠고기’는 피해 갔지만 ‘후쿠시마 볏짚’에 당할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다. 가족들에겐 말도 못했다.

 그러나 후쿠시마 볏짚보다 분통이 터졌던 건 일본 정부의 대응이었다. 일 정부는 세슘 오염 최대 허용치를 쇠고기 ㎏당 500베크렐로 정했다. 독일 등 유럽 국가(성인 8베크렐, 어린이 4베크렐)에 비해 무려 62~125배나 높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이다. 게다가 이번 ‘세슘 쇠고기’에선 최고 4350베크렐의 세슘이 검출됐다. 무릎 꿇고 국민 앞에 사죄해도 시원치 않을 일이다. 그런데 일 정부는 고자세다. “장기간 계속 세슘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건강에 영향이 없다”는 말만 반복한다. 원전 주변 볏짚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근데 더 이상한 게 있다. 바로 일본 국민이다. 음식점·수퍼마켓·급식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자녀 입에 세슘 쇠고기가 들어갔는데도 도대체 화를 내지 않는다. 전국 언론사 사이트를 죄다 검색해 봤지만 축산농가나 소비자들의 데모가 있었다는 기사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이쯤 되면 비정상이라기보다 비상식적이다.

 돌이켜보면 재해지역 쓰레기더미를 치우겠다고 예산을 잔뜩 잡아놓고도 5개월이 다 되도록 실제 예산 집행이 7%에 불과한 것, 모금된 성금이 이재민에게 20%도 채 전달이 되지 않고 있는 것도 원인은 같다. 국민이 “이건 잘못됐다”고 화를 내지 않으니 정부가 태만하고 멋대로 은폐하는 것이다. 그래도 꾹 참고 정부 하라는 대로 절전 열심히 하며 땀 흘리는 일본인들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안타깝다. 일 정부가 대한항공 이용 금지와 같은 몰상식한 일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견제장치가 작동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광우병 쇠고기에 흥분해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던 한국 국민도 거듭 각성해야 하지만 실체가 분명한 세슘 쇠고기를 먹고도 쥐 죽은 듯 조용한 일본 국민은 더 큰 문제다. “일본인 여러분. 화 좀 내세요.”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