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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단속대상은 노출보다 성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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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1895)에서 자신의 서구 체험을 바탕으로 여성들에게 외출할 것을 강권했다. 서양에선 여자를 ‘인간세계의 근원이요, 가정의 동량(棟梁)’으로 여기기 때문에 ‘내외(內外)의 예법을 허물고(不立), 어렸을 때 교육(敎誨)하는 도(道)’를 갖추고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서양에 내외법이 없는 이유가 ‘사람이 만약 한 곳에 오래 머물러 바깥 공기(外氣)를 쐬지 않으면 질병이 쉽게 생기고, 질병이 있으면 그가 생산하는 자녀의 기혈도 부실’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외법 폐지론은 유길준뿐 아니라 개화기의 담론들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 덕에 교회를 다니는 부인들과 학교에 입학한 여학생들이 집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집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걷게 된 여성들에겐 치마 길이를 짧게 할 것이 권유됐다. 전통한복의 긴 치마는 외출 시 도로의 오물과 먼지에 쉽게 오염돼 위생상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거리로 나선 여성들은 양장이나 짧은 통치마로 개량된 한복을 입게 되었다. 요컨대 처음 여성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거리에 나온 것은 그것이 근대화·문명화의 방향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변화를 이중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개화기 소설들은 여성 주인공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소재로 삼지만, 그들이 집 밖에만 나가면 항상 겁탈의 위협에 처하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위생상 치마 길이를 줄이라고 했지만, 막상 여성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장옷을 벗어 던지자 “전에는 눈만 내놓더니 지금은 (안경으로-인용자 주)눈만 가리는군”이라며 조롱했다(동아일보, 1924. 6. 11 만평). 시대는 여성의 ‘해방’을 고민하기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성들이 ‘함부로’ 집 밖에 나갔다가는 성폭력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협박’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캐나다의 한 경찰관이 “성폭행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여성은 헤픈 여자(slut) 같은 야한 옷차림을 피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시작된 ‘슬럿 워크(Slut Walk)’ 시위가 최근 한국에서도 진행됐다. ‘야한 옷’을 입은 시위 참여자들이 거리를 활보하면서 ‘여성들이 어떤 옷차림을 하고 거리에 나가도 안전한 사회’를 요구했다.

 여자가 ‘야하게’ 차려 입고 집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는 협박은 한국에서도 100여 년 전에나 통할까 말까 한 소리가 아닌가. 범죄학적으로도 신체노출과 성범죄의 인과관계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한다. 설령 여성의 신체 노출이 남성의 성욕을 자극한다 해도 단속해야 하는 것은 여성의 옷이 아니라 조절할 줄 모르는 남성들의 성욕이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