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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무상급식 투표, 대의민주주의 훼손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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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형준
명지대 교수·인문교양학부

정치권이 서울시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주민투표의 발단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무상으로 급식하는 ‘전면 무상 급식’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부자 무상 급식’ 반대가 핵심 이유다. 서울시 의회가 법을 무시하고 무상급식 예산안 신설을 강행 처리한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이를 중앙정치에 비유해보자. 지난 2002년 대선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지만 국회는 야당 의석이 여당보다 많은 ‘여소야대’ 상황이었다. 만약 야당이 새로 출범한 정부의 예산안을 무시한 채 수적 우위를 앞세워 임의적으로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예산안을 만들어 통과시키면 어떻게 될까? 미국과 같이 의회가 예산 편성권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예산 심의권만 있는 국회가 예산 편성까지 하게 되면 이는 헌법을 위배하는 것이다.

 주민투표 반대의 핵심 논리로 주민투표 자체에 내재된 정치적 비효율성과 위험성이 지적된다. 주민투표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대의 민주주의에 맞지 않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시장과 시의회 간의 근원적인 갈등은 해결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외에 주민투표 결과는 필연적으로 시장의 재신임과 연계되어 시장의 중도 하차를 가져 올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반대 주장들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갖고 있지만 왜 이 시점에서 주민투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책임 있는 행정가는 국민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서 이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선별적 급식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다수인데 이를 외면한 채 정치적으로 적당히 타협해서 자신의 소신을 접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프랑스 샤를 드골 대통령은 재임 동안 다섯 차례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마지막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프랑스 국민 누구도 그의 이런 결단을 무책임한 처신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후 프랑스 대통령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주민투표 결과에 따른 오 시장의 진퇴 여부가 주민투표 반대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이번 주민투표는 우리 사회가 어떤 복지를 먼저 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이다. 무상복지의 천국이라는 스웨덴은 사민당이 1940년대 복지 드라이브를 걸었고 70년대에 이르러 보편적 복지 체제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2010년 총선에서는 ‘보편적 복지의 한계 극복’을 공약으로 내세운 보수당인 온건당이 2006년에 이어 또다시 승리했다. 보편적 복지는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며 동시에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민주당과 진보세력은 그동안 참여민주주의를 줄기차게 부르짖었다. 그 이면에는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는 쟁점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하면 민주 시민의 자격이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자신에게 유리하면 참여를 독려하고, 불리하면 참여를 저지하는 것은 참여민주주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진정 참여정부를 계승한다면 주민투표를 회피할 것이 아니라 투표를 독려하고 당당히 투표에 참여해서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일방적 복종을 요구하고 있는 서울시와 시의회 간의 갈등이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국회가 대통령을 부당하게 탄핵하면 헌법재판소가 견제한다. 대통령이 인사권을 남용하면 국회가 청문회를 열어 견제한다. 지방의회와 지방 단체장들이 무소불위의 힘을 남용하면 주민투표나 주민 소환으로 제어할 수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정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민투표는 대의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극복해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는 소중한 장치다. 만약 이런 기회가 정치적 편의주의에 의해 박탈되면 한국 참여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는 것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인문교양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