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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3초 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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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소비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품격을 표현하는 행위다. 이른바 명품(名品)이 팔리는 이유를 뒷받침하는 이론이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난 소중하니까’라는 광고처럼 차별화를 시도한다.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제시한 ‘과시적인 소비’ 개념이다. 신분제도가 없는 현대 사회에서 누가 더 잘살고 우월한지 보여주려는 행동이 명품 구매로 나타난다.

 명품에는 꿈과 환상의 아우라(Aura)가 드리워져 있다. 1956년 미국 잡지 ‘라이프’에는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임신한 배를 손가방으로 가린 사진이 실렸다. 에르메스 제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켈리 백’이 불티나게 팔렸다. 최근 미국 시카고에 설치된 동상을 놓고 음란 논란이 뜨거운 영화배우 메릴린 먼로는 샤넬 No5를 향수의 대명사로 올려놓았다. “밤에 샤넬 No5만 걸치고 잔다”는 말 한마디의 효과였다. 여성들은 에르메스를 걸치고 샤넬 No5를 뿌리면 켈리와 먼로가 되는 달콤한 착각에 빠졌다.

 한국에서 명품 소비는 일상화됐다. 루이뷔통과 구찌 백(bag)은 각각 ‘3초 백’ ‘5초 백’이라고 불린다. 도심에서 3초와 5초에 한번씩 볼 정도로 흔하다는 뜻이다. 짝퉁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돈다발이 거리를 휘젓고 있는 셈이다. 국내 명품시장 성장을 견인하는 주된 요인으로 동료 압력(peer pressure)을 꼽는 분석이 있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소비 수준을 맞추는 체면 문화와 속물근성이 그것이다. 해마다 가격을 올려도 없어서 못 팔고, 비싸야 더 팔리는 역설이 한국에선 통한다. 스스로에 대한 부족한 자신감을 값비싼 명품으로 포장하려는 충동심을 노린 상술이다. 요즘은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는 백로효과(白鷺效果)를 활용한다. 남들이 많이 쓰는 상품을 피하는 현상이다. 최고급을 추구하는 위버 럭셔리(Uber-Luxury) 전략이 그중 하나다.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명품 매출이 크게 늘고 있다. 가죽 가방·구두·의류에 붙었던 10% 안팎의 관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명품에 도전하는 국내 업체들은 휘청댄다.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410억 달러(약 43조원)의 재산으로 올해 세계 부호 명단에서 4위에 올라 있다. 봉이 된 한국인의 명품 짝사랑이 주머니를 두둑이 채워준 덕분이다.

고대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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