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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62) 이태원 시대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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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신성일·최지희(왼쪽) 주연의 영화 ‘의형제’(1965). 신성일은 그 해 서울 이태원집에서 신혼을 보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이태원 181번지는 영화 관계자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됐다. 1960년대 중반 아이스크림·코카콜라·오렌지주스·커피·우유를 맛볼 수 있는 곳이 흔했겠는가. 우리 집은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항상 분주했다. 우리와 스킨십을 하면서 아이스크림까지 맛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엄앵란은 배우 활동을 쉬고 있었지만 집안에서도 영화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다. 제작부장들부터 한두 마디씩만 들어도 엄청난 정보가 됐다. ‘신성일을 붙들기 위해 제작부장들이 이태원집 앞에서 거적을 깔고 밤을 샜다’는 말도 있었는데, 그건 과장이다.

 손이 큰 엄앵란은 아이스크림을 큰 통으로 들여놓았다. 큰 박스로 포장된 닭다리·감자튀김 등도 들어왔다. 냉장고로는 감당이 안됐다. 냉장고와 같은 크기의 냉동고도 있었다. 에어컨 역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물건이었다. ‘Needs’라는 브랜드의 에어콘을 3층에 달아놓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한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빨리 단 것이다.

 이태원집 3층을 증축한 사람은 김수용 감독의 동생이었다. 아주 멋스럽게 지어 나로선 만족스러웠다. 그는 이태원집 3층과 함께 미8군 지하벙커를 함께 공사하고 있었다. 그 지하벙커가 얼마나 비밀스러웠는지, 건축가 역시 자신이 맡은 부분 이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미8군 기지를 보면 높은 건물이 없다. 지하벙커가 더 훌륭하지 않을까 싶다. 계약 당시 공사를 마치면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실제로 김씨는 지하벙커 완성 직후 미국으로 이민 갔다.

 이태원 문화는 우리집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본토의 각종 생활용품 목록이 적힌 백화점 ‘시어즈(Sears)’ 카탈로그가 있었다. 1000페이지 분량으로, 잔디 깎는 기계부터 등산용품까지 망라했다.

나와 엄앵란은 주로 옷을 보았다. 배우에게 옷은 생명이다. 나와 엄앵란의 경쟁력 중 하나가 옷이었다. 다른 배우들은 옷에 관한 한 나를 따라올 수 없었다.

 필요한 물건은 미군 남편으로 둔 한국 부인들을 통해 조달했다. 그들은 군사우편으로 물건을 가져왔다. 물론 면세여서 이문이 컸다. 출입증을 얻어 미8군 기지를 구경하는 것도 볼거리였다. 미군 레스토랑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갈비탕을 팔 정도였다. 무엇보다 뼈에 고기에 엄청나게 달려 나왔다.

 부대찌개는 우리의 슬픈 역사 속에 태어났다. 6·25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대구의 시장에 가면 아줌마들이 좌판에서 부대찌개를 팔았다. 그땐 ‘부대찌개’란 이름도 없었다. ‘꿀꿀이죽’이었다. 대구에도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군 식당 쓰레기통에서 나온 음식물을 씻어낸 다음 푹 끓여냈다. 닭다리와 소시지 정도만 형태가 남았다. 자존심이 강했던 나는 친구들이 먹고 있는 중에도 혼자 먹지 않았다.

 이태원 181번지에서 살 때 수많은 영화가 탄생했다. 65년 ‘적자인생’ ‘상속자’ ‘춘몽’ ‘흑맥’ ‘성난영웅들’ ‘밀회’ ‘의형제’ 등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영오 일병 총기 사건을 다룬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 같은 사회고발 작품도 있었다. 나는 어떤 작품이라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 성장했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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