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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곳’과 ‘쓸 만큼’의 예산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27호 35면

제갈공명이 위(魏)나라 군대를 정벌하기 위해 쓴 ‘출사표’는 후세 사람이 읽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감동적인 표문이다. 출(出)은 나간다는 뜻이고, 사(師)는 군사를 의미하니 곧 군대를 일으키며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 뛰어난 문장과 애국심, 비장함이 담겨 있어 오늘날까지도 많이 읽힌다.

따지고 보면 현대인들도 매일 출사표를 쓴다. 하루도 빠짐없이 삶의 전장에 나간다. 공명은 출사표에서 충분한 병사와 병기를 갖고 군대를 일으킨다 했지만 우리는 각자의 철학과 실력, 인간관계 등을 병기 삼아 일상의 삶터에 나간다. 조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렵거나 힘든 전투를 해야 하는 날이 적지 않다.

정부 부처로부터 예산 요구를 받아 내년도 예산안 편성이 시작됐다. 나라 살림을 짜면서 어렵지 않은 해가 없었지만 내년 예산 편성의 여건은 어느 해보다 어렵다. 이미 구제역 대책으로 조 단위가 넘는 돈을 썼고, 취득세 인하에 따른 국고 보전에 또 다른 수조원이 들어가게 돼 있다. 반값 등록금과 복지 확대 논쟁은 신문 지면을 뒤덮는다. 각종 지역사업에 대한 압력 또한 내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더 거세질 게 불 보듯 뻔하다. 저축은행이나 가계부채와 같은 잠재 위협 요인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지난주에 내년 예산안 심의를 시작하면서 예산실 직원들에게 공명의 출사표를 인용했다. 앞으로 할 일을 전쟁에 비유하는 게 지나칠지 모르지만 앞으로 겪을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 직원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어서였다. 국민 세금을 한 푼이라도 아끼고 꼭 필요한 곳에 써야 하는 것은 나라살림을 담당하는 공직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책무이기 때문이다. 출사표를 인용하면서 직원들에게 한 가지 더 주문했다. 긍정적인 자세였다.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공직생활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자는 요지였다.

내년 예산안은 재정건전성을 확보하면서 정부가 할 일은 제대로 하겠다는 두 가지 목표 아래 편성할 작정이다. 재정건전성의 달성은 경제위기 극복의 진정한 완결판이자 미래 위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대비책이다. 또한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하려면 한정된 재원으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쓸 곳’과 ‘쓸 만큼’을 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정운영 방향에 따른 우선순위 판단과 분명한 재원배분 원칙이 적용될 것이다. 우선순위 면에서는 일자리 창출에 가장 역점을 둘 것이다. 일자리는 서민생활 안정의 핵심이다. 서민이 느끼는 성장의 과실도, 최고의 복지도 ‘일’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정부 예산의 30%에 달하는 복지 부문의 경우 일하는 복지, 맞춤형 복지, 지속가능한 복지의 원칙이 적용될 것이다. 특히 대규모 재정이 소요되는 새로운 사업의 결정은 신중히 해야 한다. 한번 정해지면 반영구적으로 예산이 들어가 미래세대에까지 부담을 주는 교육·복지 사업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공명의 출사표는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겠다(鞠躬盡力)’는 말로 끝을 맺는다. 그런 자세를 앞으로 몇 달간 쉬는 날 없이 매일 야근을 할 직원들에게 강조했다. 고맙게도 직원들의 호응이 높았다. 긴장하는 기색 속에서도 국가경제의 최후 보루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공명이 출사표를 쓰던 시절에 썼음직한 표현을 빌리자면, 나라 곳간을 지키기 위해 투구끈을 조여 매고 병장기를 단단히 잡는 심정이다. 출사표를 쓰는 심정으로 휴일인 오늘도 사무실로 향한다.



김동연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으로 2008년 경제위기 극복에 기여했다. 미시간대 정책학 석·박사. 덕수상고 졸업 후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1982년 행정·입법 고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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