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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20%’의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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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호 34면

‘중산층이 무너진다’는 자극적인 표현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초다. 중산층을 지탱하던 봉급생활자들이 전례 없는 감원과 감봉을 겪으면서다. 제일은행 직원 4000여 명이 은행을 떠나면서 제작한 비디오가 수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 것도 이때다. 그 이후 양질의 일자리가 줄면서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일이 이어졌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중산층은 96년 68.5%에서 2000년 61.9%, 2009년 56.7%로 줄었다. 색깔이 제각각인 세 정권(김대중-노무현-이명박)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다양한 처방을 썼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고현곤 칼럼

김대중 정부는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벤처를 육성했다. 때마침 전 세계에 불어닥친 닷컴 열풍에 힘입어 일부 ‘인생 대역전’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버블이 꺼지면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다. 김대중 정부 후반기의 경제는 한마디로 버블 경제였다. 내수를 부양하기 위해 돈을 풀고, 신용카드를 남발했다. 경기는 나아지는 듯했으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신용불량자가 쏟아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더 많은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떨어졌다.

2002년 말 촛불시위는 반미 감정에서 비롯됐다. 그 이면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중산층의 불만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김대중 정부와는 다른 ‘진짜 진보’와 ‘더 큰 변화’를 꿈꾸며 노무현 후보를 택했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을 ‘잘나가는 20%와 희망 없는 80%’로 편 갈랐다. ‘승자 독식의 카지노 경제’라는 표현도 썼다. 하지만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기존의 것을 비판하고 무너뜨리는 데 일가견이 있지만,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는 익숙지 않은 진보 진영의 맹점을 답습한 것이다.
국민은 진보 정권의 한계를 절감했다. 다시 예전의 ‘잘 살아 보세’로 마음이 기울었다.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해 줄 것 같은 인물을 원했다. 이명박 정부가 2007년 대선에서 압승한 배경이다. 이명박 정부는 ‘감세와 규제 완화를 통한 7% 성장’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했다. 하지만 첫해부터 운이 없었다. 2008년 봄 광우병 파동과 가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안팎의 두 방을 맞고 휘청거렸다. 그 뒤 MB노믹스를 뒤로 하고 ‘공정한 사회’를 내걸었지만 국민의 호주머니는 두둑해지지 않았다.

상황은 갈수록 좋지 않은 쪽으로 흐르고 있다. 양극화에 관한 한 보수ㆍ진보 누가 정권을 잡아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회의적 시각이 늘고 있다. 양극화 해법으로 자주 거론되는 게 ‘서비스업 선진화’이지만 이게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이익집단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시간이 양극화를 해결해 줄 것 같지도 않다. 베이비부머 세대(1955~63년생) 713만 명이 속속 은퇴하고 있다. 이들에게 남은 건 대출이 끼어 있는 집 한 채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자녀들이다. 게다가 20~3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우리 경제가, 우리 사회가 궁지에 몰린 것이다.

급한 대로 나라 곳간을 헐어 쓰고 보자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게 됐다. 이게 요새 정치권에서 ‘보편적 복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돼 있다. 후대를 기약할 여유가 없는 국민도 내심 이를 바라고 있다. 내년 대선은 진보ㆍ보수 가릴 것 없이 복지 경쟁으로 치달을 게 틀림없다. 그렇게 경쟁적으로 곳간을 털고 나면 포퓰리즘으로 국력이 쇠락했던 60~70년대의 영국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반전이 없는 한 우리는 그렇게 가고 있다.

방법이 없다고 걱정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양극화는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미국도 10% 인구가 70% 넘는 부를 차지하고 있다. 인종 갈등이 내재돼 있어 우리보다 더 복잡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도 미국 사회가 돌아가는 것은 상위 계층이 봉사하고 기부하면서 따뜻한 사회를 구현하는 덕분이다. 굳이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의 감동적인 기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사회 구석구석에 베푸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라고 상위 20%가 못 하란 법은 없다. 희생과 나눔ㆍ화합을 실천해 승자 독식의 사회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으면 한다. 대ㆍ중소기업 갈등, 낙하산 인사, 전관예우, 부정부패, 가격 담합, 집단이기주의, 이런 것이 지속되는 한 따뜻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국민이 감동할 정도로 내려놓으면 양극화로 각박해진 세상은 한결 살맛 나게 바뀔 것이다. ‘나라 곳간을 털고 보자’는 무책임한 주장도 설 땅을 잃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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