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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의 즐거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27호 34면

밤에도 어디든 다닐 수 있는 도시가 있다. 호신용 스프레이나 총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갱으로부터의 위협도 없다. 이곳에서 위험을 느끼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사는 곳, 바로 서울이다. 택시에 놓고 내린 지갑도 다음 날이면 주인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전 세계 어떤 대도시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1100만 명이 사는 대도시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안전한 서울’의 모습은 대중교통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지하철은 밝고 깨끗하다. 여름엔 냉방, 겨울엔 난방도 잘 된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잠깐 눈을 붙이기도 하고, 서 있는 사람의 가방을 맡아준다. 서울 대중교통의 분위기는 미국 뉴욕은 물론 전 세계 어느 대도시보다 안전하고 쾌적하다. 미국은 어떨까. 낡고 비효율적인 대중교통 수단은 위험한 곳이라는 인상까지 풍긴다.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일어난다.

외국인인 나는 종종 주목의 대상이 된다. 낯선 한국인이 적극적으로 영어로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낯선 사람이 다가설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미국의 지하철에서 누군가 다가와 ‘어디서 왔느냐’고 말을 건넨다면 최대한 빨리 그 상황을 피하려 할 것이다. 낯선 이를 접했을 때 취해야 하는 일종의 규칙이다. 눈을 맞추지 말고, 질문에 답하지 말 것. 그런데도 그가 당신을 계속 따라온다면? 즉시 경찰에 알려야 한다. 한국에서 이런 반응은 불필요하다.

더구나 한국에선 경찰을 볼 일 자체가 거의 없다. 나는 서울의 이런 점이 좋다. 미국에선 늘 경찰이 거리를 지나다니는데, 마치 뭔가 찾아내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물론 나의 괜한 죄책감 탓일 수도 있다). 일상의 풍경에 경찰이 자주 등장하면 도시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반면 한국에선 평소 경찰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자체만으로도 안전감은 높아진다.

가장 큰 차이는 이것 같다. 미국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뉴스가 쏟아진다. 선정적인 범죄 뉴스 때문에 사방에서 납치와 강도, 성범죄와 살인이 벌어지는 것 같다. 미국이 매우 위험한 나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은 내게 당신의 아버지도 총을 갖고 있느냐고 묻는다(그는 총기 소지자가 아니다). 사실 난 진짜 총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 역시 미국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수많은 총을 볼 때마다 미국은 언제 어디서나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곳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서울은 정말 안전한 도시가 맞을까. 혹은 안전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걸까.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내 주변에 도둑맞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내 경험만으로 서울이 훨씬 안전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울에서 훨씬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은 늘 서울에 사는 나를 걱정한다. 북한의 김정일 때문이다. 휴전선에서 고작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나보다, 5000㎞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미국인들이 북한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이 더 큰 것이다.

이 도시를 이렇게 안전하게 느끼는 건, 외국인인 내가 한국 뉴스를 자세히 접할 수 없기 때문일까? 간혹 그런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영어로 뉴스를 보도하는 한국의 언론 매체가 범죄나 사건사고를 상세히 다루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나는 행복한 거품 속에 사느라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테다.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천국에 사는 셈이다.

어쨌거나 문단속을 잘해야 된다거나, 현금을 잔뜩 들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거나, 그런 최소한의 보안만으로도 나의 서울 생활은 안전하다. 즐겁다.



미셸 판스워스 미국 뉴햄프셔주 출신. 미 클락대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아트를 전공했다. 세종대에서 MBA를 마치고 8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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