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넘어서
④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숨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자는 구상이 나왔다.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서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이었다. 이 운동을 따라가다 보면 공통적으로 만나게 되는 인물이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1870~1917),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이다.
이 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첫 번째는 을사늑약 직후이고, 두 번째는 망국 직후이다. 이회영의 평생 동지였던 독립운동가 이관직(李觀稙)은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할 적임자로 손꼽힌 인물이 바로 이상설이었다. 이회영과 함께 활동했던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이정규(李丁奎)는
망명 당시 이상설은 대한제국의 고관을 역임한데다 국제적 시야까지 갖추고 있었다. 양명학의 한 반향(班鄕)이었던 충북 진천군 덕산면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동부승지 이용우(李用雨)의 양자로 서울로 올라와 이회영과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일화는 많다. 10대 때 신흥사(新興寺)에서 학우들과 합숙하면서 수학·영어·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는데, 위당 정인보는 “통역 정도는 오히려 얕은 데 속해서 스승 없이 영어에 능통하였다”라고 회고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는데, 선교사 헐버트에게 배웠다고 전해지는 것은 회화일 것이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은 “이상설은 모든 분야의 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득달했는데 하루는 논리학에 대한 문제를 반나절이나 씨름하다 못 풀고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풀었다고 기뻐한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정인보의 제자인 강화학파 민영규 교수는 “보재와 치재(恥齋:이범세)가 사랑채 뒷방에 몸을 숨기고 왕양명(王陽明)을 공부하며 하곡(霞谷:정제두) 등 강화소전(江華所傳)을 읽고 있었다”고 전하는 대로 소론가 자제답게 양명학을 공부했다. 이건창(李建昌)이 24세의 이상설을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뒤를 이을 대학자로 지목한 것은 조선의 학문 전통을 바탕으로 양명학은 물론 서양의 신학문까지 흡수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정인보가 “조정에서는 그(이상설)를 물에 뜬 돛대로 생각했고, 선비들은 주석(柱石)으로 의지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스물여섯의 나이로 관제 개혁 전의 성균관 대사성에 해당하는 성균관 관장에 올랐다. 이건창이 “(이상설은) 나라의 부유함의 상징이요, 백성들의 복이요, 사대부의 영예”라고 말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설은 자신의 영달보다 나라의 앞날을 더 앞세우면서 고난의 인생길에 접어들게 된다. 1905년 정2품 의정부 참찬이던 이상설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머리를 돌에 찧어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 광경을 때마침 백범 김구가 목도하고
용정촌이 현재의 연길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인데, 이상설은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매입해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연다. 북간도이면서 동만주에 속했던 용정촌은 북동쪽으로는 러시아령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로 국내와 통하는 교통 요지이고 무엇보다 교포들이 계속 이주하고 있어서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적당한 장소였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 운동이 우리 역사에 끼친 중요한 업적은 좁은 반도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대주의적 유학자들이 만든 쇄국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깨져나갔다.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이야말로 국제화의 선구자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은 1907년 4월 용정촌을 떠나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1908년 8월에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참석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등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유림(儒林) 출신 의병장들도 망명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강원도 춘천 출신의 유인석(柳麟錫)과 경상도 성주 출신의 이승희(李承熙)였다. 유인석과 이승희는 같은 유림이지만 사상적 배경은 조금 달랐다.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유인석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문인이었는데, 이항로는 이(理)를 기(氣)보다 높이는 ‘이존기비(理尊氣卑)’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지고 천하가 편안해지나 기가 주가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지고 천하가 위태로워진다고 보았다. 이런 심전주리설(心專主理說)은 대외적 관점에서 이(理)를 명나라·소중화(조선)로 대치하고, 기(氣)를 일본·서양으로 대치하면 강력한 침략 저항 논리가 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적인 관점에서 ‘이’가 양반계급으로 대치되고 ‘기’가 일반 백성으로 대치되면 다시 성리학 체제로 회귀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항로가 고종 3년(1866) 대원군이 철폐한 만동묘(萬東廟:명 신종·의종의 사당) 복설을 청한 것이 그의 이런 사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승희는 영남 유림의 거두였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의 아들이었다. 이진상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주자)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심(心)과 이(理)를 별개로 본 것과 달리 심(心)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했다.
심즉리설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이단으로 몰았던 왕양명의 주요 사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명학자로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상으로는 양명학에 동조했던 셈이다. 이진상의 학맥인 한주학파에서 면우(<4FDB>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 회당(晦堂) 장석영(張錫
英:1851~1929), 심산 김창숙(金昌淑:1879~1962)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다. 이승희의 문집인
이승희는 1908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함북 사람 김(金) 감리(監理)의 집에 거주할 때 헤이그에서 돌아온 이상설을 만난다.
이렇게 망국 이전 만주 용정촌에 이어 한민족이 흥하는 터전이란 뜻의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한흥동(韓興洞)이 개신 유림과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